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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데 예로니모

성 프란치스코 데 예로니모(Saint Francis of St. Jerome)

축 일 : 5월 11일

신 분 : 신부

활동 지역 : 나폴리(Napoli)

활동 년도 : 1642-1716년

같은 이름 : 방지거, 예로니무스, 제로니모, 제롬, 지롤라모,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 스, 히에로니모, 히에로니무스


프란치스코 디 지롤라마(Franciscus di Girolama)로도 불리는 성 히에로니무 스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de Hieronym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타 란토(Taranto) 근방 아풀리아(Apulia)의 그로타글리에(Grottaglie)에서 태어 났다. 그는 타란토의 예수회 대학에서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베키오(Vecchio)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수학한 후 1666년 나폴리에서 교구사제 로 서품되었으나 28세 때에 스스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정식으로 서원 을 발하고 죽을 때까지 농촌 선교사로서 나폴리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뛰어난 설교는 단순하고도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할 때는 양 같 고 설교할 때는 사자 같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만큼 그의 설교로 감화를 받 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회개자를 얻기 위하여 감옥과 매음굴을 서슴없이 찾아다녔고 작은 촌락과 뒷골목 그리고 길모퉁이에서도 그의 선교활 동은 계속되었다. 또한 그는 무어인들도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터키 죄수들 까지 신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를 통해 회개한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이는 자신의 부친을 살해한 어느 프랑스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회개한 후 남장을 하고 에스파냐 군에서 복무하였다. 또한 그는 위험한 환경에 있는 수많은 어 린이들을 구하였다. 그의 장례식 때에는 나폴리의 거의 모든 걸인들이 관 주 위에 모여 그를 애도하였다. 그는 1806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복 자품에 올랐고, 18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성 되었다.



(가톨릭 홈)

 

[예수회의 성인들]


성 프란치스코 데 예로니모


프란치스코 데 예로니모는 1642년 12월 17일 이탈리아 남부의 타란토 지방에 서 11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열한 살이 되던 해 테아티노 회의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그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성당의 제의방 일을 돕게 되 었다. 그리고 사제들이 선교여행을 떠날 때는 그들과 동반하여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도 하였다. 1658년에는 삭발례를 하고 타란토 교구의 사제 지원자(신학생)가 되었다. 1659년 공부를 위해 타란토에 있는 예수회에서 운 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여 고전문학과 철학을 배웠다. 1665년에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대학에 들어가 민법과 교회법을 공부하였으며, 1666년 3월 20일 교 구 사제로 서품되었다. 4년 후인 1670년 7월 1일 프란치스코 신부는 예수회 입회를 지원하였다. 방년 27세였고 아직 신학공부가 다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 예수회에 입회한 후 처음의 몇 년간의 이탈리아 남부지방에서 설교선교와 영적지도에 전념하였다. 1676년 신학 양성의 최종 단계를 마친 후에는 나폴리 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향후 40년간 나폴리 지방의 이곳저곳을 순회하며 사목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주로 광장 등에 나가서 설교를 하였는데 어떤 날은 짧은 설교를 마흔 번이나 했다고 한다. 그의 설교는 소박하였지만 마음과 정성을 다했기에 많은 사람들 에게 감화를 주게 되었다. 그는 설교를 통해 가능하면 매달 한 번씩 성체를 영하도록 권하였다. 또한 열심인 남자 신도 이백 명으로 구성된 신심단체를 만들어 당시 항구 주변에 만연하던 풍기가 문란한 분위기를 쇄신하는데도 기 여하였다. 많은 병자들을 방문하고 참혹한 상태에 놓여 있던 노예들이나 수인 들을 자주 방문하여 용기를 주었다.


병자를 방문할 때는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순교자인 성 시르(그는 생전에 의 사였다고 함)의 유해를 가지고 갔다. 성 시르의 유해는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 을 일으킨다고 전해져 있었는데, 특별한 기적이 일어날 때마다 프란치스코 신 부는 “성 시르의 간구 덕분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사목적 성공의 주변의 일부 성직자들에게 질투를 유발하였다. 그는 결국 나폴리의 대주교에 의해 고발을 당했다. ‘프란치스코 신부는 아주 흉악한 범 죄자들과 어울리기 때문에 사제나 수도자들의 영적지도에 적당하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공공장소에서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대 신 그는 고백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대주교는 그에 대한 비난이 무고한 것임을 알고 그에게 사과하고 금지령을 해제하였다. 그런 데 프란치스코 신부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예수회 공동체 내에서의 공동생활에 불충실하다는 이유로 관구장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 는 선교활동을 위해 외출을 청하였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큰 동요 없이 늘 평화 속에 생활하는 그의 모습은 주위의 동료들을 감동시 켰다.


프란치스코 신부는 1716년 5월 11일,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1806년 5월 2 일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839년 5월 26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에 의해 시성되었다.


예수회의 레도호후스키 전 총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성성을 칭송하였다. “프란치스코 신부는 설교를 준비할 때면 늘 기도와 고행 안에서 하느님의 도 움을 청하였다. 동시에 그는 시간만 나면 면학에 열중하여 이 모든 것들이 사 목에 도움이 되도록 힘썼다.”


[이냐시오의 벗들, 2013년 10월호, 구정모 마르코 신부(일본 상지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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