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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Saint Damien de Veuster)

축 일 : 5월 10일

신 분 : 신부, 선교사

활동 지역 : 하와이의 몰로카이섬(Molokai of Hawaiiian Isle)

활동 년도 : 1840-1889년

같은 이름 : 다미아노, 다미아누스, 다미앵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원명은 Joseph de Veuster)는 1840년 벨기에의 한 작은 마을에서 성실하고 신앙심 깊은 아버지 프랑스와 드 베스테르와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들처럼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으나 수도원에 들어간 큰형의 영향을 받아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깊어 기도와 고행을 실천하면서 성장하였다.


일찍이 영성에 눈을 뜬 그는 고향에서 초등 교육과정을 마치고 발론(Vallon) 지방의 르 콩(Brain le Comt)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하던 중,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적 권고를 통해 완덕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1859년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The Fathers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 일명 Picpus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수도회 회칙에 따라 의사로서 시칠리아 섬의 주민들을 헌신적으로 돕다가 4세기 초에 순교한 다미안으로 세례명을 바꾸었다. 수도회 입회 후 벨기에 루뱅과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였다.


해외선교를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던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는 1825년 이해 수차례에 걸쳐 하와이 군도의 샌드위치 섬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었다. 1863년 하와이 선교사로 선발된 큰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자 성 다미안은 형을 대신하여 하와이 선교를 자원하였다. 이듬해 하와이로 간 성 다미안은 호놀룰루 근교의 아피마뉴 대신학교에서 약 2개월 간 공부하고, 그 해 5월 호놀룰루 대성전에서 메그레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후 푸노(Puno) 지역에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성 다미안 신부는 1865년에는 코할라(Kohala)로 옮겨 원주민들의 인습과 싸우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성당을 짓고 용암으로 덮인 섬을 돌아다니면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1865년 하와이 군도에 나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감염된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법이 제정되었는데, 이에 따라 나환자들은 몰로카이(Molokai) 섬에 격리 수용되었다. 1873년 메그레 주교로부터 몰로카이 섬에 수용된 나환자들의 참상을 전해들은 성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나이로 그곳에 건너가 700여 명이 넘는 나환자들의 집을 지어주고, 의사의 도움 없이 나환자들의 고름을 짜 주고 환부를 씻어 주며 붕대를 갈아주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밝혀 주었다. 그리고 매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고 무덤을 파고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나환자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자 냉담하던 환자들도 신뢰와 존경심을 가지고 따르게 되었다. 1881년에는 하와이 정부로부터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카라카우아’ 훈장을 받았다.


성 다미안 신부는 1885년 자신이 나병에 감염된 것을 알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나환자들을 위하여 계속 일하였다. 요양하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1889년 4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성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1936년 몰로카이 섬에서 벨기에로 옮겨 안장되었다. 성 다미안 신부는 1992년 7월 시복 대상자로 확정되었고,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Brussel)의 퀘켈베르그 대성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9년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가톨릭 홈)

 

다미안 신부


한센병 친구들과 16년 동고동락 ... 가슴에 '용기' 심어


▲ 선종 전 다미안 신부



그는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 환자들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결국… 그도 한센병을 앓게 됐다.


벨기에(Belgium)? 낯선 나라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유럽 북서부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로 설명되어 있다. 수도는 브뤼셀. 한반도의 약 7분의 1크기 땅에 1050여만명이 살고 있다.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종교는 가톨릭 75%, 기타(개신교 포함) 25%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전부다. 음악에 관심 있는 젊은이라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주제가를 부른 벨기에 국적의 다나 위너(Dana Winner)라는 여가수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낯선 작은 나라가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성자를 배출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 10월 1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신부를 성인 반열에 올렸다.


1840년 벨기에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하느님 부르심의 징표에 응답하겠다는 비범한 각오를 보여 주었다. 그 결과 성장해서는 형을 따라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The Fathers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에 입회했다.


그런데 하와이 선교사로 선발된 큰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는 일이 일어났다. 형은 더 이상 하와이에서 사목할 수 없었다. 이에 다미안은 형을 대신해 하와이 선교를 자원한다. 1864년 하와이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호놀룰루 근교의 아피마뉴 대신학교에서 약 2개월 간 수학한 후, 그 해 5월 호놀룰루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 다미안 신부는 섬 곳곳을 누비며 미사를 봉헌하는 등 헌신적으로 사목에 임했다. 그러던 중 그의 삶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하와이 군도에 한센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이에 감염된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법을 제정됐고, 이에 따라 한센병 환자들은 몰로카이(Molokai) 섬에 격리 수용됐다. 치료와 보호를 위한 격리수용이 아니었다. 한센병 환자들은 철저히 버려졌으며, 외면됐고, 잊혀졌다. 몰로카이 섬의 참상을 전해들은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나이로 그곳에 자원해 700여 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과 자비로 돌보기 시작했다. 집 없는 사람에게는 집을 지어주었고, 손가락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고름을 짜주고 싸매주었으며, 자포자기한 사람들에게는 재생의 은혜를 가르쳤다. 그는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한센병 환자들에게 다가갔고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 환자들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그 자신도 한센병을 앓게 됐다. 한센병 발병 당시의 모습은 일본인 오타베의 「몰로카이 나병의 섬과 그 영웅 다미안 신부」에 생생히 묘사돼 있다.


“1885년 어느 날 밤 다미안은 언제나 못지않게 피로하여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일도 일이거니와 피로의 도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목욕을 하면 몸도 기분도 좀 풀리려니 하고 목욕물을 끓였다. 잠깐 실수로 그는 뜨거워진 목욕물을 양말도 신지 않은 발등 위에 쏟았다. 아차 하는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컥했다. 덴 자리에 아픔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감각의 상실! 그것은 무엇보다 확실한 나병의 증상이다. 다미안은 너무나 심한 놀라움에 그만 옆으로 몸을 눕히고 말았다. 그리고 흉칙하게 일그러진 자기의 마지막 순간이 눈 앞에 떠오른다. 다미안은 일찍부터 이날이 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에 걸린 후에도 계속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으며, 평온과 내적 평화의 놀라운 표양 그리고 충실한 기도, 특별히 자기 수도회의 전통에 따라 성체 조배와 성체 신비 묵상에 대한 놀라운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16년 동안 한센병 환자들 가운데서 살며,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교사”라고 말했다. 이런 다미안 신부에 대해 교황요한 바오로 2세는 2005년 이렇게 말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 치유와 사회 복귀 가능성을 옹호한 세계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은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취된 그의 신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신앙의 은총으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를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복음은 특별히 나환자들에게 구세주의 동정심에 대한 생생한 표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들이 그토록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도덕적인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미안 신부는 이 복음 메시지의 사도요 그 증거자였습니다.”


다미안 신부에게도 죽음이 찾아왔다. 1889년 4월 19일,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한센병 환자들의 옆에 묻혔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진지하게 내적인 기쁨으로 수도 서원을 갱신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지상에서가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한 부활절을 경축하고 싶습니다.”


그의 삶과 신앙은 ‘도화선’(導火線, fuse)이었다.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을 온 세계에 전파시키는 도화선이었다. 2005년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 주민들은 가장 위대한 벨기에인으로 다미안 신부를 선정했다. 다미안 신부는 선종 즉시 시복 시성 절차가 이뤄질 듯 했지만, 성인품에 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종한 지 103년이 지나서야 1992년 7월 시복 대상자로 확정됐고,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의 퀘켈베르그 대성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이후 지난해 7월 교황청 시성성은 10년 전 하와이에서 한 은퇴 여교사가 다미안 신부의 전구로 말기 폐암이 치료된 것을 기적으로 인정해 복자 다미안 신부의 시성을 예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0월 1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다미안 신부가 남긴 말


- 하느님 진실로 내 인생은 행복이었습니다.

- 주님, 저에게도 같은 나병을 허락하시어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게 해주소서

-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 나도 나환자가 됐습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 나는 교우라는 말 대신, ‘우리 나환자’라고 말합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29일), 우광호 기자]


 

몰로카이의 성자 “다미안 신부(축일 4월 15일)”의 생애


바다로 둘러싸인 외딴 곳에서 사목하는 한 사제가 자신의 사목구를 방문한 주교님을 만나기 위해 조각배를 저어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배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곳은 정부당국으로부터 주교님을 비롯한 모든 일반인의 상륙이 금지된 격리 수용지였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에 목말랐던 사제는 성사를 볼 수 있게 단 몇 분이라도 승선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지만 무참히 거부당합니다. 그러자 사제는 자신이 타고 온 조각배의 뱃머리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주교님은 그의 고백을 듣기 위해 최대한 바다를 향하여 몸을 기울입니다. 배 밑에는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하는 사제, 배 위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엄숙하게 듣는 주교님, 그 순간 바다 전체가 거대한 고해소가 되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고해성사의 장면은 ‘몰로카이의 성자’ 다미안 신부님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일화입니다.


사제 다미안은 1840년 1월 4일 벨기에의 트레멜로 마을에 있는 베스테르 집안에서 여섯째로 태어나 요셉(Joseph de Veuster)이라는 이름으로 세례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고 건장했기에, 부모는 그가 실업교육을 받아 집안의 기둥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그는 성소를 꿈꾸었고 끈기 있는 그의 지향은 결국 열매를 맺어 형이 먼저 입회한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에 들어가 ‘다미안’이라는 수도명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불굴의 지향은 다미안 신부의 가장 큰 덕목이었습니다.


해외선교가 주요 목적이었던 성심 수도회는 하와이 군도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63년 선교사로 선발된 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신학 공부 중이던 다미안은 형을 대신하여 하와이로 가고자 했으나 수련장이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몰래 프랑스에 있는 수도원의 총원에 청원서를 냅니다. 그리고 그 청원이 수락되어 이듬해 하와이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피마뉴 대신학교에서 약 2개월간의 남은 신학 공부를 마친 후, 그 해 1864년 5월 21일 호놀룰루 대성당에서 루이 메그레 주교에 의해 사제 서품을 받습니다. 이후 하와이 군도의 푸나, 코할라, 하마쿠아 지구를 맡아 8년 동안 그곳에서 사목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미안 신부가 하와이에 도착했던 당시 그곳 사정은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서구 질병에 항체를 갖고 있지 못하였던 하와이의 주민들이 티푸스, 콜레라, 매독과 같은 병에 전염되어 1790년에 50만 명이었던 인구가 1865년에는 겨우 5만 명으로 줄어든 상태였고, 인구의 10~15%가 한센균(나균)에 감염될 정도였습니다. 이에 공포에 사로잡힌 정부는 치유 불가능한 한센병 환자를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반포했습니다. 자녀, 연인, 부모에게서 강제로 격리된 환자들은 하와이 군도 중앙에 위치한 몰로카이 섬의 북쪽 ‘칼라우파파’라고 불리는 오지, 즉 삼면은 바다이고 육지와 연결된 남쪽은 600~900m의 벼랑으로 막혀 있는 춥고 습한 곳으로 쫓겨났습니다. 약속했던 옷과 음식은 제공되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40%의 환자가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지옥의 땅, 그곳이 바로 몰로카이 섬의 ‘칼라우파파’였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33세의 다미안 신부는 1873년 5월부터 새로운 사목을 시작합니다.


다미안 신부는 통나무처럼 떡 벌어진 가슴과 근육을 지니고,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인 끈기 있는 지향이라는 무기를 지니고 자신의 사명을 실천하였습니다. 때로는 불 같은 성격으로 인해 손에 몽둥이를 들고 밀수꾼, 뚜쟁이, 노름꾼, 도둑들을 대적했으며, 정부 당국과 세상과 교회를 향해서는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부(루카18,1-8)”처럼 청원함으로써 환자들의 삶을 향상시켰습니다. 16년의 사목 생활 동안 다미안 신부는 사제이면서 동시에 경찰, 건축가, 목수, 간호원, 농부, 농장 관리인, 변호사, 은행가, 수입상, 부동산 중개인, 기업가, 무덤 파는 인부, 그리고 관 제작자로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특히 타고난 목수였던 다미안 신부는 경당, 사제관, 학교, 성당(필로메나 성당)뿐 아니라 집 없는 사람에게는 집을 지어주고, 손가락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고름을 짜주고 싸매주었으며, 자포자기한 사람들에게는 재생의 은혜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스스럼없이 환자들에게 다가갔고, 환자들을 친구로 대했습니다. 환자들이 재배한 토란 요리와 그들이 피고름 나는 손으로 집어 주는 돼지고기를 받아먹었으며, 사제관을 모든 환자들에게 개방하였고, 한 환자를 요리사로 두기까지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서 환자들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다 결국 자신도 그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1885년,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안 다미안 신부는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 나도 나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론할 때 나는, 교우라는 말 대신 ‘우리 나환자’라고 말합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에 감염된 후에도 나환자들을 위하여 계속 일하였습니다. 요양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1889년 4월 15일 성주간 월요일 8시에 선종하였습니다.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성 필로메나 교회 바로 옆, ‘칼라우파파’에서 첫 밤을 지냈던 나무 아래에 묻혔습니다. 그 후 벨기에 정부가 하와이로부터 허가를 받아 고향 땅으로 모셔, 현재는 벨기에 루뱅의 성 요셉 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의 해로 선포된 2009년 10월 11일, 성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하여 성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0년 3월호]

 

참고자료


■ 오다베 다네아끼 저, 김대신 역, 다미안 신부 - 나환자의 사도, 서울(성바오로), 1970년

■ 최익철 저, 우표로 보는 교회를 빛낸 분들 - '다미안', 서울(으뜸사랑), 2014년, 243-246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 '다미안 드 베스테르',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6년, 1496-14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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