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술피치오 세베로(Saint Sulpicius Severus)
축 일 : 1월 29일
신 분 : 주교, 교회사가
활동 지역 : 부르주(Bourges)
활동 년도 : +420/425년경
같은 이름 : 술피치우스, 술피키오, 술피키우스
갈리아(Gallia) 지방의 교회사가이자 성인전기 작가인 성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또는 술피치오 세베로)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대부분의 이야기는 겐나디우스(Gennadius, +5세기경)의 “명인록”(De viris illustribus)과 그의 친구였던 놀라(Nola)의 성 바울리누스(Paulinus, 6월 22일)의 “서한”을 통해서이다. 그는 360년경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Aquitain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보르도(Bordeaux)에서 고전과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성 바울리누스를 만난 것 같다. 공부를 마친 뒤 변호사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부유한 집정관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였으나 부인이 일찍 사망하자 곧 공직 생활을 청산하고 389년경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394년경에는 모든 재산을 다 청산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요인은 부인이 일찍 사망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성 술피키우스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의 권고와 성 바울리누스의 모범에 의한 것이었다.
<성 술피치오 세베로 나타난 세례자 요한과 성 아우구스티노>
그 후 성 술피키우스는 엘루소(Eluso)에 머무르다가 자신을 위해 일부 재산을 남겨 두었던 프레물리아쿰(Premuliacum)이라는 마을에 은둔하며 영성생활과 저술활동에 열중하였다. 이 마을은 툴루즈(Toulouse)와 카르카손(Carcassonne) 사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었다. 또 그는 이 은둔 장소에 성 마르티누스가 세운 수도원과 유사한 공동체를 형성하여,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장모인 바술라(Bassula)와 함께 생활하였다. 바술라는 성 술피키우스에게 물질적인 도움은 물론 영성생활로 나아가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성 술피키우스가 순교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었다. 406년 12월 갈리아 지방이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았을 때 프레물리아쿰도 황폐화되었는데, 성 술피키우스는 이때 무사히 피신하여 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또 420-425년 사이에 프리밀락(Primillac)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겐나디우스는 성 술피키우스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의 오류에 빠져 생애 말기에 보속행위로 죽을 때까지 저술을 중단하고 절대 침묵의 삶을 살았고, 그 당시의 저자들이 성 술피키우스가 평신도라고 전하는 것과는 달리 사제직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또한 전통적으로 부르주의 주교였다고 전해지나 그 또한 확실하지 않다.
[가톨릭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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