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안젤로(Blessed Angelus of Acria)
복자 안젤로(Blessed Angelus of Acria)
축 일 : 10월 31일
신 분 : 설교가
활동 지역 : 아크리(Acri)
활동 년도 : 1669-1739년
같은 이름 : 안겔로, 안겔루스, 안젤루스
이탈리아 아크리 태생인 안젤루스(Angelus, 또는 안젤로)는 카푸친회의 입회를 두 번이나 거절당하고, 1690년 세 번째의 청원에서 허가를 받았다. 그는 주로 설교 사도직을 수행하였는데 첫 번째의 설교가 너무나 실패작이라서 수없이 기도하고 연습하였다. 그래서 1711년 사순절 동안 실시한 나폴리의 설교가 대성공을 거두자 그는 위대한 설교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안젤루스는 일생 동안 줄 곧 칼라브리아(Calabria), 나폴리(Napoli) 등지를 돌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켰고, 치유의 기적도 행하였다. 또 그는 환시와 탈혼의 경험이 많아서 예언의 선물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능력 있는 고해신부였다. 그는 아크리타니아(Acritania)의 수도원에서 운명하였고, 1825년 12월 18일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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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리의 복자 안젤로(Blessed Angelus of Acri, 1669-1739)
엄밀한 시험을 거친 성소,
‘출퇴근하는 수련자’
(‘세 번 두드리라’는 뜻인) “Knock Three Times”는 1970년대의 활발한 미국 팝송 제목이다. 하지만 이 제목은 역시 17세기 후반, 20살짜리 ‘루카 안토니오 팔코네(Falcone)’가 수도생활 초기에 경험했던 그 성소위기를 요약해서 묘사하는 것 같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어느 한 카푸친 형제의 설교에 매혹된 남이탈리아의 아크리 마을 출신의 그 시골의 청년은 어머니의 눈물과 다시 생각해보라는 여러 친척들의 애원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카푸친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689년 11월 8일, 그는 다피냐노(Dipignano)의 수련원 문을 처음으로 두드렸고, 그곳 형제들에게 환영을 받은 뒤, 카푸친 수도복을 입고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되었다. 그 이름은 ‘안젤로 형제’, 안젤로는 ‘천사’라는 뜻이다.
카푸친 형제회 안에서의 잠시 동안의 그 생활은 천사들의 생활과 유사했다. 땅으로 향한 눈길, 묵주를 돌리는 손, 그리고 하늘로 드높여진 마음! 그러나 젊은 안젤로 형제가 형제회에서 만난 천사들은 모두 다 좋기만 한 천사들은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서 타락한 천사 루시퍼의 교활한 유혹들과도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는 심하게 유혹을 받았고, 결국 수도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집에서의 생활마저 그를 공허하게 만들었고, 곧 그는 겸손하지만 용감하게 카푸친 수련원으로 다시 돌아가 두 번째로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관구봉사자의 특별 허가 덕분에 수련원의 문이 다시 한 번 그에게 열리게 되었고 그는 재차 수련복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수도복이 수도승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카푸친 수도복을 입는 것만으로는 안젤로 형제가 겪었던 그 옛 유혹을 이기는 데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곧장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수도회를 두 번째 떠나자마자 그는 자신의 경솔한 결정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또 다시 카푸친 형제들에게 돌아가 세 번째로 문을 두드렸다. 안젤로 형제가 그토록 자주 수련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기에, 재치 있는 몇몇 형제들은 그를 “출퇴근하는 수련자”라고 불렀다. 1890년 11월 12일, 총봉사자가 모든 선례를 깨고 루카 안토니오에게 다시 수련기를 시작할 특별 허가를 내렸는데, 그와 같은 형제들의 놀라움을 상상해보라! 하지만 이번에 그는 1739년 그의 죽음까지 카푸친으로 남을 운명이었다.
1825 12월 18일, 아크리의 안젤로 형제는 시복되었다. 하지만 당시 거룩한 생활을 하려는 그의 몸부림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수련원으로 다시 돌아온 다음에도, 그는 미래의 성인 ‘코를레오네의 베르나르도’ 형제의 모범에 따라, 오직 거친 보속행위와 열렬한 기도로써 수도회를 떠나고픈 유혹을 물리쳐 수도생활에 항구할 수 있었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그를 괴롭혔던 유혹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기대만큼 형제들의 가난 생활이 이상에 훨씬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감이거나, 혹은 정결을 거스르는 유혹을 물리치려는 데에 스스로 헛수고만 한다는 좌절감일 수도 있다. 마지막 설명이 더 그럴싸하다. 그는 정욕을 이기고, 정결에 대한 은총을 얻는데 12년 이상이나 분투해야 했다고 스스로 고백한 적이 있다. 일찍이, 안젤로 형제 스스로 그러한 유혹들과 힘겹게 싸운 그 경험은 그를 비슷한 성소 위기를 겪고 있는 후배 형제들에게 인정이 넘치는 영적지도자가 되게 했을 것이다.
근면성실한 부모의 아들
이 위기는 안젤로 형제에게 닥친 첫 번째 위기도 마지막 위기도 아니었다. 꽤 어렸을 때 그는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와 교구 사제였던 외삼촌의 도움에 의해 자라났다. 안젤로 형제는 1669년 10월 19일 ‘아크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루카 안토니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가난한 염소치기 농부인 츠란치스코 팔코네와 제빵사인 디아나 에느리코(Enrico)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종교심이 깊은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동네 초등학교에서 기본 교육을 받았고, 집에서 기초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매주 그는 동네 카푸친 성당에서 어머니와 함께 미사에 참례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그의 첫 사랑
1691년, 안젤로 형제는 종신 서약을 했고, 1700년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의 첫 소임은 설교였는데, 복음 전파에 대한 그의 초창기 노력들은 실패하기가 일쑤였다. 그것은 그가 기발한 표현방식과 박식한 화술로 무장한 당대의 위대한 설교자들을 모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본연의 모습이 되는 것을 배워야했고, 자신만의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설교를 하느님 말씀, 특히 복음에 대한 영적 독서를 기반으로 삼아야 했다. 소박하고 알아듣기 쉬운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그는 악습을 비난하며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특히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기를 강력히 권고하곤 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체 안 실존,그리고 통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복음의 부르심에 있어서 그만의 응답 안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듯이, 그의 설교 원정들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 유혹에 맞서기 위해 ‘코를레오네의 베르나르도’ 형제를 본받기로 영감을 받은 것도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였다. 사실 그리스도 고통에 대한 묵상은 그의 개인 기도생활의 매우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설득했고, 그의 본당 피정에서도 늘 그가 앞장 선 채, 그 지역 산비탈을 향한 십자가의 행렬로 마지막을 장식하곤 했다. 또, 그는 본당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지불하신 그 대가, 그리고 우리가 거룩한 성덕의 삶으로 그 구원의 은혜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언덕 꼭대기에 세 개의 나무 십자가들을 심곤 했다. 그는 설교할 때에 성체조배를 많이 고취시켰는데, 보통 카푸친회 전통 신심행사인 ‘40시간 성체조배’를 포함시켰다. 때때로 그의 미사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는데, 그것은 안젤로 형제가 눈앞 제단위에서 펼쳐지는 신비들을 관상하느라 자주 황홀경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 특히 통고의 성모님이란 명칭에 대한 깊은 신심을 품었다.
끝까지 형제들의 종이자 하느님 백성의 봉사자로
안젤로 형제는 수도원 안에서 수많은 봉사직무들을 맡았는데, 그중에는 수호자와 관구봉사자의 소임도 있었다. 형제들을 대할 때 그는 다정하고 너그러웠지만, 그와 동시에 성 프란치스코의 회칙과 카푸친 회헌을 지킬 것을 권할 때는 결코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설교와 고해성사를 주는 것은 그에게 첫사랑과도 같았기에 아크리의 안젤로 형제는, 1739년 10월 30일, 선종 때까지 이 봉사들에 몰두했다. 그의 시신은 아크리에 있는 ‘복자 안젤로의 성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곳은 카푸친들이 관리하고 있다.
“카푸친들이요 성 프란치스코의 참된 아들들임은 크나큰 은총이며 크나큰 영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다섯 개의 소중한 보석들을 알아보고 지녀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엄격성, 단순성, 회헌과 세라핌적 회칙에 대한 엄밀한 준수, 삶의 결백함, 그리고 고갈될 줄 모르는 애덕 (말입니다).” - 아크리의 복자 안젤로
[출처 : 카푸친작은형제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