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드 브레뵈프(Saint John de Brebeuf)
축 일 : 10월 19일
신 분 : 선교사, 순교자
활동 지역 : 캐나다(Canada)
활동 년도 : 1596-1649년
같은 이름 :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콩데(Conde)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Joannes)은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길 원하였다. 그러나 사제직을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몸이 약하였다. 하지만 그는 1617년에 루앙(Rouen)의 예수회에 입회하여 1615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선교사를 지원하여 캐나다 퀘벡 주로 떠났으며, 주로 인디언 휴런족(Huron)이 많이 거주하는 동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캐나다로 온 이후 그는 인디언들 사이에서 34년 동안이나 전교활동을 개척한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고초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629년 영국인들이 퀘벡을 점령하고 예수회원들을 몰아낼 때 그도 쫓겨나서 하는 수 없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1633년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 같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1637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수천 명의 인디언들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선교사들이 재앙을 몰고 온 악마로 간주되어 인디언 마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요한은 그 와중에도 인디언들 곁을 떠나지 않고 1640년까지 함께 거주하였다. 그가 잠시 퀘벡으로 갔다가 다시 인디언 부락으로 왔을 때, 프랑스와 가장 적대적이던 이로쿼이(Iroquois) 인디언들로부터 체포당하여 처참하게 살해당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가 보인 용기와 성덕은 수많은 인디언들을 감동시켜,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약 7천 명의 인디언 개종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는 휴런족을 위해 프랑스어-휴런어 사전과 그들의 언어로 된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성 요한과 더불어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은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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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의 성인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성 이사악 조그와 동료 순교자 (1)
17세기에 프랑스 예수회원들은 북아메리카의 선교에 정열을 쏟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인디언 휴런 족이 사는 지역에서 열심히 선교하였다. 그들은 세인트로렌스 강과 북미의 5대호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북미에 최초로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하였는데 특별히 1642년부터 1649년 사이에 8명의 예수회원이 인디언들에 의해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이들은 1925년 6월 2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0년 6월 29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1) 순교한 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2)
성 르네 구필 : 르네 구필은 1642년 9월 29일에 북미에서 최초로 순교하였다. 그는 1608년 프랑스의 상 심포리온에서 출생하였다. 외과의사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나 1639년 3월 26일 모든 걸 포기하고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런데 몇 개월 후 난청 때문에 고생하다가 결국 예수회를 퇴회하였다. 퇴회 이후에는 ‘도네’라는 하는 예수회를 돕는 평신도 협조회원의 일원이 되어 계속해서 예수회원들의 선교 사업에 관여하였다. 선교사를 돕는 평신도 협조회원들은 예수회원과 똑같이 장상에 순명하고 무보수로 일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 것을 약속하였다. 그는 1940년 예수회원들과 퀘벡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 설립된 병원에서 한동안 일하였으나 인디언들과 보다 가까이 생활하고 싶다는 원의를 가지고 있었다.
1642년 이사악 조그 신부가 휴런 족의 선교를 도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퀘벡으로 왔다. 마침 구필은 의사로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판단되었다. 세인트로렌스 강을 타고 선교지로 향하던 그들은 8월 2일, 약 70여 명의 모호크 족 사람들에 의해 습격을 당했다. 체포된 후 그들은 손톱이 빠지고 손가락이 잘리고 이가 빠지는 고문을 당했다. 모호크 강을 따라 끌려가던 도중, 구필은 다시 예수회의 평수사로 입회하기를 청하였고 그 자리에서 조그 신부의 허락을 받고 예수회원으로서 허원하였다. 오세르네논(현 뉴욕 주의 오리스빌)에 도착하여 그들은 갖가지 혹독한 고문과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구필 수사는 인디언 아이 한 명에게 십자성호를 알려주었다. 이것이 그 아이의 삼촌에게 알려지자 그 삼촌은 달려와서 구필의 목을 쳤다. 구필 수사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였다.
성 이사악 조그 : 1607년 1월 10일 프랑스의 오를레앙에서 출생하였다. 예수회에 입회하여 1632년 1월에 서품을 받은 조그 신부는 그해 7월 2일 퀘벡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모호크 족에 의해 습격을 받기까지 약 6년간 휴런 족을 위해서 선교활동을 했다.
조그 신부는 구필 수사가 순교한 이후에도 약 1년 넘게 노예로서의 삶을 계속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도움을 받아 탈출하는데 성공, 현 미국의 뉴욕 시에 해당하는 뉴 암스테르담에서 프랑스 예수회원들과 감격적인 재회를 했다.
1644년 다시 선교를 위해 퀘벡 지방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을 노예로 삼았던 모호크 족을 위한 선교를 위해 준비하였다. 1646년 10월 17일, 오세르네논에 당도하기 직전 조그 신부와 동료들이 체포되었다. 그는 모호크 족의 족장이 개최한 연회에 가던 도중 잡혀서 도끼로 맞아 순교하였다. 기념일 10월 19일.
1) 이들의 선교활동과 순교를 그린 영화 가 1991년에 제작되었다.
2) 최초의 3명은 현 미국 뉴욕 주의 북부에 위치한 오리스빌에서 모호크 족에 의해서 순교했고, 나머지 5명은 휴런 족이 이로코 족에 의해 습격당했을 때 순교하였다. 그래서 최초의 3명은 미국의 순교자 명단에 그리고 나중의 5명은 캐나다의 순교자 명단에 들어 있다.
[이냐시오의 벗들, 2015년 3월호, 구정모 마르코 신부(일본 상지대학교 교수)]
[예수회의 성인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성 이사악 조그와 동료 순교자 (2)
지난호에서는 현 미국 뉴욕 주의 북부에 위치한 오리스빌에서 모호크 족에게 순교당한 예수회원들을 소개했는데, 이번호에서는 주로 캐나다 지역에서 이로쿼이 족에 의해 순교당한 이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안토니오 다니엘 신부는 1601년 5월 27일 프랑스의 디프에서 출생하였다. 법률을 공부하던 중 성소를 받고 1621년 10월 1일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루앙에서 실습기를 보내고 있을 때 누벨 프랑스(퀘벡 지역)에서 온 휴런 족의 젊은 유학생과 만나면서 장차 휴런 족을 위한 선교사의 꿈을 꾸게 되었다. 1631년 파리에서 서품받고 잠시 프랑스에서 교사로 일했다.
1632년 다니엘 신부는 퀘벡 지방으로 향했다. 잠시 케이프 브레톤 섬에서 봉사한 후 퀘벡의 휴런 족 마을로 들어갔다. 잠시 동안 브레뵈프 신부로부터 휴런어를 공부했고 1634년부터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하였다.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위한 학교를 개설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10년 넘게 휴런 족을 위해 성실히 봉사했다. 1648년 7월 4일, 이로쿼이 족이 휴런 족을 습격하였다. 다니엘 신부는 휴런 족을 안전하게 교회 안에 피신시키고 자신은 교회 문 앞에서 저항하였다. 습격자들은 다니엘 신부를 총과 화살로 사살하고 유체를 잔인하게 찢은 다음 교회에 불을 지르고 그 위에 던져버렸다.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는 1593년 3월 25일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에서 출생, 1617년 11월 8일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622년 2월 16일 서품받고 루앙의 예수회 학교에서 재정을 담당하였다.
1625년 휴런 족 선교를 자원, 4월 24일 디프 항을 떠나 퀘벡으로 향했다. 처음 2년간은 휴런 족의 언어와 관습을 배우는데 주력하였다. 몇 년 간 선교에 정력을 쏟았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전쟁에 프랑스가 패하자 프랑스로 돌아가는 처지가 되었다. 1631년 예수회 학교에서 근무하던 다니엘 신부를 만나 두 사람은 다시 휴런 족 선교를 위한 열의를 품게 되었다.
1632년 다시 퀘벡 지방으로 출항한 브레뵈프 신부는, 1632년 5월 23일 임지에 도착하였다. 다니엘 신부와 함께 학교를 개설하고 선교에 정열을 쏟았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당시 휴런 족에 전염병이 돌았는데 이것이 선교사들 탓이라는 소문 때문에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생활하였다.1)
1649년 3월 15일 브레뵈프 신부는 상 루이 마을에서 가브리엘 랄르망 신부와 함께 이로쿼이 족의 습격을 받았다. 그들은 선교 협력을 하던 휴런 족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여러 가지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손톱이 뽑히고 손가락은 절단되었으며 엄동설한에 발가벗겨진 채로 밖에 세워졌다. 또한 코와 입술이 잘리고 불에 달궈진 쇠사슬이 그들의 어깨 위에 놓여졌다. 그리고 세례를 빗대어 펄펄 끓는 물을 그들의 머리 위에 쏟았다. 3월 16일 오후 4시경, 그는 동료 순교자들을 마지막까지 격려하며 숨을 거두었다.
동료 랄르망 신부의 고문은 브레뵈프 신부가 순교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랄르망 신부에게도 끓는 물을 붓고 손을 자르고 눈을 빼고 불타는 장작을 그의 입에 처박는 등 잔혹한 고문을 계속했다. 최후에 그들은 그의 혀를 절단하고 심장을 꺼내서 구워먹었다. 랄르망 신부가 순교한 것은 3월 17일 오전 9시쯤이었다.
1) 온타리오의 미드랜드에 가면 선교 기념관과 성당을 방문할 수 있다.
[이냐시오의 벗들, 2015년 4월호, 구정모 마르코 신부(일본 상지대학교 교수)]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와 동료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251-253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요한 드 브레뵈프와 동료 순교자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590-6591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요한 드 브레뵈프', 서울(성바오로), 2002년, 268-2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