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04일 화요일(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Memorial of Saint Francis of Assisi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
프란치스코회 창설자. 아시시 근처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에서 '무너진 나의 집을 돌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복음을 실천하는 수도회를 창설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복음정신에 따라 세상에서 순례자로 살며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수도회 설립 후에 그는 시리아와 스페인, 심지어는 근동에까지 선교 여행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아시시 근방에서 보냈는데 눈이 먼데다가 중병을 앓았습니다. 영면 뒤 아시시의 성당에 안장되었으며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와 함께 이태리의 주보성인입니다.
+ 갈라티아서 1, 13-2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해설) 바오로는 유다교를 신봉하는데 앞장섰으며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열성적인 유다교 광신자였습니다. 회심하기 전의 바오로는 그리스도 교회에 대해 증오와 박해를 일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는 그리스도교를 없애려 했던 사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로 바뀌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24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 1st Reading, Galatians 1:13-24
13 You have surely heard how I lived in the past, within Judaism, and how there was simply no limit to the way I persecuted the Church of God in my attempts to destroy it; 14 and how, in Judaism, I outstripped most of my Jewish contemporaries in my limitless enthusiasm for the traditions of my ancestors. 15 But when God, who had set me apart from the time when I was in my mother's womb, called me through his grace and chose 16 to reveal his Son in me, so that I should preach him to the gentiles, I was in no hurry to confer with any human being, 17 or to go up to Jerusalem to see those who were already apostles before me. Instead, I went off to Arabia, and later I came back to Damascus. 18 Only after three years did I go up to Jerusalem to meet Cephas. I stayed fifteen days with him 19 but did not set eyes on any of the rest of the apostles, only James, the Lord's brother. 20 I swear before God that what I have written is the truth. 21 After that I went to places in Syria and Cilicia; 22 and was still unknown by sight to the churches of Judaea which are in Christ, 23 they simply kept hearing it said, 'The man once so eager to persecute us is now preaching the faith that he used to try to destroy,' 24 and they gave glory to God for me.
묵상)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만나면 새사람이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롭게 변화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게 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 안에서만이 새롭게 변화됩니다.
+ 루카 10, 38- 42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해설) 마르타는 예수님을 모셔 들였으며 그분을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 한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마르타는 활동가의 모범이며 마리아는 관상가의 모범입니다. '활동하는 관상가'는 기도와 노동의 균형을 이루며, 기도와 노동으로 서로를 살찌우게 할 것이며 그래서 영적으로 풍요로울 것입니다.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Holy Gospel of Jesus Christ according to Saint Luke 10:38-42
38 In the course of their journey he came to a village, and a woman named Martha welcomed him into her house. 39 She had a sister called Mary, who sat down at the Lord's feet and listened to him speaking. 40 Now Martha, who was distracted with all the serving, came to him and said, 'Lord, do you not care that my sister is leaving me to do the serving all by myself? Please tell her to help me.' 41 But the Lord answered, 'Martha, Martha,' he said, 'you worry and fret about so many things, 42 and yet few are needed, indeed only one. It is Mary who has chosen the better part, and it is not to be taken from her.'
묵상) 마르타는 자기의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내어 다른 사람들을 섬길 줄 아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여인입니다. 한편 마리아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여긴 영적으로 성숙한 여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인간의 협조를 원하십니다. 프란치스코에게 무너져가는 교회를 세우기를 명하셨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실행하였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하며 그 뜻을 따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2016년 10월 04일 화요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조창수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https://youtu
.be/0KB8yY_hs60
Donovan - Brother Sun, Sister Moon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 루카 10, 38- 42
1. 오늘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마르타 같이 봉사와 준비로 분주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마리아와 같이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며 관상하는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와 일 안에서 활동하며 관상합니다. 성당에 나가 열심히 봉사하지만 나 역시 실적이나 형식에 집착하여 일에만 분주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2.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은 본인인데 정작 마리아가 자신의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마르타는 자신의 역할에 불평합니다. 나도 누군가가 나의 공로와 수고를 알아주길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의 좋은 몫을 위해 기꺼이 내 몫을 내어놓고 조연의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
축 일 : 10월 4일
신 분 : 부제, 설립자
활동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년도 : 1181/1182?-1226년
같은이름 :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done)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부친이 출타 중인 틈을 이용하여 어머니가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다가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1202년에 투옥되었다.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았고, 병에서 회복한 뒤로는 딴사람이 되었다.
그는 스폴레토(Spoleto)에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내 교회를 고쳐라”는 말씀을 들으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옛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는 버려진 옛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에서 들은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내다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부친과 결별하게 되었고,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가난 부인’을 모시는 통회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고, 3년 후인 1210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가 극도의 가난을 살려는 그와 11명의 동료들을 인정하였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본부는 오늘날 아시시 교외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 안에 있는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이었다.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부터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면서 형제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의 생활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하였고 교계 진출 또한 사양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1212년에 그는 성녀 클라라(Clara)와 함께 ‘가난한 부인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때 그는 모슬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갈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레크 알 카멜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결국 사라센 선교가 실패로 끝난 줄 알고 성지를 방문한 뒤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217년부터 이 수도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하여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관구가 형성되고 잉글랜드(England)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고, 우고리노(Ugolino) 추기경의 도움으로 규칙을 확정짓고 승인을 받았다.
1224년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면서 그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는 오상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당나귀를 타고 움브리아 지방을 다니며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기력이 쇠하여지고 눈마저 실명되어 갔다. 그런 고통의 와중에서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병세가 깊어지자 성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로 숙소를 옮겼다. 미리 유서를 작성하고 자신의 죽음의 다가온 것을 알자 그는 알몸으로 자신을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사들에게 요한 복음서의 수난기를 읽게 한 후 시편 43장을 노래하며 1226년 10월 3일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다음날 아시시에 있는 산 조르조(San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2년 후인 1228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230년 5월 25일 그의 유해는 엘리아가 그를 기념하여 지은 프란치스코 대성전의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
지금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공경은 세계 도처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가 세운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도 다른 재속회원과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그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를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아시시의 가난뱅이 프란치스코 만큼 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시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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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_2016년 10월 04일 화요일(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