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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요안나 들라누

성녀 요안나 들라누(Jeanne Delanoue)

축 일 : 8월 17일

신 분 : 설립자, 수녀

활동 지역 : 프랑스

활동 년도 : 1666-1736년

같은 이름 :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성녀 요안나 들라누(Joanna Delanoue)는 1666년 6월 18일 프랑스 앙주(Anjou) 지방 사뮈르(Samur)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종교용품점을 운영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열두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169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어머니의 사업을 이어받아 현명하고 성실하게 운영해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1698년 성령 강림 대축일 주간에 그녀는 인간의 삶과 일의 가치에 대한 두 개의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하나는 환시 체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렌(Rennes)에서 순례를 떠난 과부 프란체스카 수쉐(Francesca Souchet)의 신심 깊은 권고의 말이었다. 이 두 사건은 그녀의 사고방식을 바꿔 자신의 안위에만 만족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보다 영적인 수준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잘 나가던 상점 문을 닫고 세상의 안락함과 성공이 아닌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특별히 사뮈르 지역의 고아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마침 그녀의 선행에 감동한 사람들이 세 채의 집을 기증하자 이를 가난한 고아들의 안식처로 만들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자선활동에 동참하면서 작은 모임이 형성되자 그녀는 1704년 ‘사뮈르의 하느님 섭리의 성녀 안나 수녀회’(Sisters of St. Anne Providence of Samur)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수도명을 ‘십자가의 요안나’(Jeanne of the Cross)로 정하였다.


성녀 요안나 들라누는 치유의 기적을 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1721년 무렵에는 그녀와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가 이미 프랑스 전역에 많은 고아원과 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고행과 기도 속에 늘 헌신적으로 자선활동을 벌이던 그녀는 1736년 8월 17일 프랑스의 팡세(Fencet)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1947년 11월 8일 교황 비오 12(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3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녀 요안나 들라누

사업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은인으로 인생의 진로를 바꾼 여성



성녀 요안나 들라누(Jeanne Delanoue, 1666-1736)는 1666년 6월 18일 프랑스 앙주(Anjou) 지방 사뮈르(Samur)에서 들라누 가정의 열두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사뮈르에서 아버지는 포목상을 운영하였고 어머니는 종교적인 용품을 취급하는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169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성격이 쾌활하고 의욕적이며 꿈도 많았던 요안나가 어머니가 하던 사업체를 인계받았다. 그 당시 워낙 많은 사람들이 그런 업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그 사업은 경쟁이 치열하였고 때로는 무모할 정도로 난장판을 이루었지만, 요안나는 그런 사업의 가치에 대하여 그리고 이익창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파악하고 현명하고 재치 있게 처신하여 동종 업게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렇게 사업을 훌륭하게 운영하던 요안나는 어느 날 성령의 이끄심을 받고 갑자기 자기 인생의 진로를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1698년 성령 강림 대축일 주간에 그녀는 인간의 삶과 일의 가치에 대하여 각기 다른 두 계시를 체험하였다. 요안나는 환시를 체험하고, 이어서 렌(Rennes)에서 순례의 길을 떠난 과부 프랑스 수쉐(Frances Souchet)로부터 신앙의 열정에서 우러나는 권고의 말을 들었다. 이 두 사건을 경험한 뒤 요안나는 심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 이전까지는 이윤을 창출하고 사업을 성공시켜야겠다는 것이 그녀의 주된 관심사였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이라는 커다란 빛 앞에서 이런 생각을 빛을 잃고 말았다. 요안나는 자기 주위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그동안 성공한 사업가로서 누리던 반듯한 삶이 마치 불모지와 같이 전혀 쓸모없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할 정도로, 요안나는 상점의 문을 닫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 그리고 소외된 이들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가장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이는 사뮈르 지역의 고아들이었다. 요안나의 선행에 감동한 사람들이 기증한 세 채의 집에 그녀는 고아들을 수용하면서 그 집들을 가난한 모든 사람들의 안식처로 만들었다. 요안나가 시작한 사도직이 알려지면서 점점 더 많은 친구들이 그녀의 자선활동에 동참하였는데 그녀의 조카도 이 자선활동 대열에 합류하였다. 1704년 그녀는 자신의 젊은 친척과 자선활동 그룹 중에서 신뢰할 수 있는 두 사람과 함께 ‘사뮈르의 하느님 섭리의 성 안나 수녀회’(Sisters of St. Anne Providence of Samur)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십자가의 요안나’(Jeanne of the Cross)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녀는 몽포르의 성 루이(St. Louis de Montfort)에게 격려를 받고 용기를 내어 오라토리오 수도회(Oratorian) 신부들로부터 매우 커다란 집 한 채를 임대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뮈르 지방의 어린이들, 가난한 여성들 그리고 병자들을 받아들여 돌보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세운 수녀회는 앙제(Angers) 교구의 주교로부터 교회법상 합법적인 활동단체로 승인받았다. 요안나는 고행과 극기생활을 철저히 하였고 치유의 기적을 행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721년 무렵에는 그녀가 세운 성 안나 수녀회가 프랑스 전역에 퍼져 활동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5년 후 1736년 8월 17일 요안나는 팡세(Fencet)에서 선종하였다.


1947년 교황 비오 12세가 요안나를 복자로 시복하였고 1982년 10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녀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요안나를 “자선활동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 탁월한 여인”이라고 칭송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요안나 들라누의 성덕을 선포하면서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온전히 당신 자신을 봉헌한 이분의 영신적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찌 보면 이 분의 성품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심경의 큰 변화를 일으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본다면 성령께서 요안나 들라누를 이끄시어 그녀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그녀가 특별히 온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였던 어린아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이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상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요안나 들라누는 이러한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버지 하느님의 큰 사랑과 부드러운 손길을 보여 주려고 하였습니다. 요안나 들라누가 전적으로 의존한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어린이와 같은 신뢰심으로 하느님께,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의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분이 수도회를 시작할 때부터 수도회와 여러 가정들의 이름이 하느님의 섭리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요안나 들라누가 성모님께 당신 자신을 전적으로 항구하게 바친 것은 복되신 성삼위께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친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성녀 요안나 들라누의 축일은 8월 17일이다.

[교회와 역사, 2010년 4월호, 번역 송영웅 바오로(봉명학원 재단이사)]

 

참고자료


■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성 잔 들라누’,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301-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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