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제르마나 쿠쟁 (Saint Germaine Cousin)
축 일 : 6월 15일
신 분 : 동정녀, 목동
활동 지역 : 피브락(Pibrac)
활동 년도 : 1579-1601년
같은 이름 : 저메인, 절메인,게르마나, 게르마네, 제르마네,
성녀 제르마나 쿠쟁(Germana Cousin, 또는 게르마나)은 프랑스 툴루즈(Toulouse) 교외 어느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병약한데다가 연주창(連珠瘡)까지 걸렸으며 손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래서 집안에서만 지냈고 계모의 구박이 심한 처지에서 자라났다. 그녀는 음식 찌꺼기나 얻어먹으며 벽장이나 외양간에서 잠을 잤으며 아홉 살부터는 매일같이 양을 치러 다녔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열심을 비웃으며 ‘완고한 미신장이’로 불렀다. 제르마나는 이 모든 것을 선의로 받아 들였고, 누구에게나 항상 도움을 베풀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착한 소녀였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그녀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것은 어느 추운 겨울날 그녀가 빵 하나를 걸인에게 주었다고 계모로부터 심한 꾸중을 받을 때부터였다. 그때 제르마나가 자기 앞치마를 펼치자 봄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 얼마 후 그녀는 계단 아래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1644년부터 그녀의 무덤에서는 수많은 치유 기적이 일어났고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녀는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가톨릭 홈
성녀 제르마나 쿠쟁(St. Germanie Cousin, 6월 15일)
콩쥐같은 착한 성품으로 새어머니 학대에도 원망않고 가족들 위해 기도
1579~1601. 프랑스 피브락 출생.
학대받는 아이들의 수호성인
성녀 제르마나 쿠쟁은 평생을 가족들 학대에 시달리며 살았다. 성녀의 아버지는 아내가 일찍 죽자 재혼했다. 성녀의 새어머니는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태어난 성녀를 못마땅해하며 온갖 구박을 서슴지 않았다.
성녀는 못생긴 외모에 워낙 허약한 체질이어서 온갖 병을 달고 살았다. 새어머니는 이런 성녀를 잘 돌봐주기는 커녕 밥도 주지 않고 자주 때리곤 했다. 심지어는 성녀 다리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학대했다. 성녀 아버지는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장애인 딸이 탐탁지 않았던 터라 모른 척했다.새어머니에게 자식이 생기자 새어머니는 자신의 딸에게 성녀의 병이 옮을까 걱정하며 성녀를 양을 키우는 헛간으로 내쫓았다. 엄동설한에도 덮을 것 하나 주지않고 식사도 먹다 남은 빵조각을 던져줄 뿐이었다.
그러나 성녀는 이러한 상황을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다. 오히려 양과 친구로 지내며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이 가족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했다.
헛간에 있던 양은 성녀를 등에 태우고 매일 성당으로 데려가곤 했다. 어느 날 폭우로 성당으로 가는 개울가 다리가 유실됐는데 성녀를 태운 양이 개울가 앞에 서자 개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고 전해진다.성녀는 마을 거지들에게 자신이 먹는 빵을 모아 건네주곤 했다. 새어머니는 성녀가 집에서 빵을 훔쳐 거지들에게 나눠준다고 생각하고 성녀를 때리려 했다. 그 때 성녀가 자신의 결백을 말하며 앞치마를 펼쳤을 때 앞치마에 아름다운 꽃들이 수북히 쌓였다고 한다.
성녀의 성덕과 믿음은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모두가 성녀를 칭송했다. 성녀는 22살 꽃다운 나이에 헛간에서 숨졌다.성녀 시신은 40년 뒤 발굴됐는데 그 때 시신은 한 군데도 썩지 않고 온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녀 무덤에서는 많은 치유기적들이 일어났다. 성녀는 1867년 비오 6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평화신문, 제1023호(2009년 6월 14일), 박수정 기자]
성녀 제르마나
온갖 학대 속에서 신앙 지켜 - 축일은 6월 15일
성녀 제르마나는 1579년 남부 프랑스 '삐브라끈'의 쿠쟁家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제르마나는 이후 병에 걸려 심한 고통을 받았다. 그로 인해 그녀의 오른손과 팔이 마비되어 불구가 되었다.
매우 딱딱하고 성질적이고 악한 쿠쟁家의 여주인은 제르마나를 마굿간에서 생활하도록 만들었다. 제르마나는 마굿간에서 곰팡내 나는 검은 빵을 먹고 누더기를 걸친 채 양떼를 돌보는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양떼를 치면서 실을 잣는 일도 해야만 했으며, 실을 적게 잣는 날에는 심한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제르마나가 교육이라고 받은 것은 매주일 미사 후 들은 교리교육 뿐이었다. 그녀는 교리를 들을 때마다 한마디도 빼먹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경청했다. 그녀는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기 위해 실에 매듭을 지어 묵주로 사용했으며 나무토막 두 개를 묶어 십자가로 사용했다. 제르마나는 자신의 고된 일과와 주위의 멸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무 불평도 토로하지 않았다. 신앙심이 남달리 두터웠던 제르마나는 매일 아침이면 새벽 일찍 일어나서 길을 걸어 미사에 참례했다.
온갖 학대를 받으며 세상의 밀바닥에서 생활했으나 언제나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마음과 열렬한 신앙심을 지녔던 제르마나는 1601년 그녀 나이 22살로 마굿간에서 조용히 눈을 갔았다. 그녀의 유해는 '삐브라끄'의 성당에 안치돼 있다. 1867년 교황 삐오 9세에 의해 시성된 '삐브라끄'의 성녀 제르마나의 축일은 6월 1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