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바의 성 안토니오(Saint Anthony of Padova)
축 일 : 6월 13일
신 분 : 신부,교회학자, 설립자
활동 지역 : 파도바(Padova)
활동 년도 : 1195-1231년
같은 이름 :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포르투갈 리스본(Lisbo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페르난도(Fernandus)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성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포르투갈 국왕 알폰소 2세의 궁중기사의 아들이었다. 성 안토니우스는 신앙심 깊은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리스본 주교좌성당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다가 15세 되는 해에 집 근처에 있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212년에는 자신을 찾아오는 친구와 친척들을 피하기 위해 다시 코임브라(Coimbra)에 있는 성 십자가 참사 수도회로 옮겨 8년 동안 공부와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후 1219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220년 1월 16일 모로코에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순교자들의 유해가 성 십자가 성당으로 옮겨져 왔는데, 이때 자신도 순교자가 되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그 해 코임브라의 작은 형제회로 옮겨 안토니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곧바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의 소망대로 무어인들에게 설교하기 위하여 모로코로 파견되었으나, 도착 직후 병으로 인하여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 후 1221년의 아시시(Assisi)의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에서 개최된 작은 형제회 총회에 참석했다가 코임브라에서 조용히 은둔하며 고행 생활을 하던 그는 포를리(Forli) 근처의 몬테파올로(Montepaolo) 운둔소로 가게 되었다. 어느 날 코임브라 관구장인 그란치아노(Granziano) 신부와 함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를리로 갔는데, 마침 미사에서 강론할 마땅한 사람이 없어 성 안토니우스가 맡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설교가로서의 큰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그는 카타리파가 성행하던 북부 이탈리아 지방과 알비파(Albigenses)가 성행하던 남부 프랑스에서 설교하라는 명을 받고 활발한 활동을 시작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뛰어난 설교와 화술은 불같았고, 설득력이 있었으며 모여든 군중들을 매료시켰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군중들은 구름처럼 운집하였다. 그는 작은 형제회의 첫 번째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설교직에 더욱 헌신하기 위하여 공식적인 직책에서 면제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고해성사를 주는 신부로서의 그의 성공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중 1226년 10월 프란치스코 성인이 사망하자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듬해 에밀리아(Emilia) 관구의 관구장 대리로 선출되었으나, 설교에 전념하기 위해 1230년에 사임한 뒤 파도바 수도원에 정착하면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파도바 전체를 완전히 개종시킨 그의 설교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채무자,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는 일을 비롯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고 이단자를 개종시키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였다.
1231년 그는 수종 등을 겸한 열병으로 잠시 요양할 목적으로 캄포 산 피에로(Campo San Piero)로 갔으나, 병이 심해져 파도바로 되돌아오는 길에 베로나(Verona)의 아르첼라(Arcella)에 있는 클라라 수녀회에서 운명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그의 유해는 현재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이례적으로 바로 다음 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46년에는 비오 12세(Pius XII)로부터 교회학자, 복음적인 박사로 선언되었다.
성 안토니우스의 수많은 기적 이야기와 설교 능력은 가톨릭 교회의 전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를 능가할 만한 설교가가 나오기는 힘들 정도로 높이 평가해왔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안토니우스를 일컬어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 ‘살아있는 계약의 궤’라고 하였으며,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 안토니우스 성인에게 기도하면 곧바로 찾는다는 전설이 생겼다. 이는 어느 수련자가 허락없이 성인의 시편집을 가져갔다가 성인이 발현하여 돌려달라고 해서 그 시편집을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일생 그들을 위해 헌신했던 성인의 이름을 따서 19세기에 '안토니우스 성인의 빵'이라는 구호단체가 설립되어 오늘날까지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를 그림으로 그릴 때에는 팔에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한 방문자가 안토니우스 성인이 탈혼 중에 일어난 이 일을 기록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출처 : 가톨릭 홈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 편집부
1. 성인에 관하여
성 안또니오는 성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초대 학자이며 ‘기적의 성인, 빠도바의 성인’이라 불리운다. 안또니오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이라는 곳에서 아버지 말치노, 어머니 데레사로 두 귀족의 집안인 부모 밑에서 1190년 8월 15일 탄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국왕 스테파노 2세의 궁전에서 국왕을 모시는 용감한 기사였고 드높은 기품과 너그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머니 데레사는 경건한 마음과 이지적, 지적이며 상냥한 성격으로 설득력과 교육에 특별한 자질이 있었다. 안또니오는 관례대로 나은지 8일째 성세 성사를 받았는데 이름은 페르란도라고 지었다. 페르란도라는 뜻은 “평화 안에 용기 있는 자”란 뜻이다.
페르란도는 대성당 부속학교에 다니다가 16살에는 리스본에 있는 폴로라의 성 빈체시오 수도회로 학교를 옮기었다. 부모의 각별한 사랑과 훌륭한 교사 밑에서 교육을 받은 페로란도는 기사의 아들로서 부족함이 없는 아들이었다. 페르란도는 1210년 5월 어느 날 성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여 포라 성 빈첸시오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2년을 지내고 꼬임부라에 있는 성 십자가 수도원에서 덕과 학문을 탐구하였고, 1220년에 사제로서 신품 성사를 받았다.
1220년 포르투갈의 친왕 돈 베드로가 모로코에서 전교를 하다가 순교한 프란치스꼬회 수사 5명의 유해를 그가 생활하고 있는 수도원에 안치되는 것을 보았다. 5명의 순교자는 비타르, 오베, 베드로, 아쿠스, 아쿨리 이다. 이 당시 자모이신 성 교회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터키 제국이 가깝게는 서양에서, 멀리 동양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이교도들이 승전을 거듭해서 같은 그리스도교 국민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분파와 새로운 학설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페르란도는 이러한 불행을 보고 이교도가 살고 있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암흑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영혼들에게 광명의 불을 켜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런데 페르란도가 소속되어 있던 아우구스티노회는 당시에 이교도 사이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참으로 페르란도는 안타까워했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럴 즈음 움브리아 평야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마을에서는 새로운 작은 형제들이라는 프란치스꼬 수사들이 맹렬한 기세로 각지로 번져갔고 자체 방어에 급급했던 것을 뛰어 사라센 사람이나 그밖에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다녔다. 페르란도는 이것을 보고 수도원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보다 그들처럼 사랑의 실천을 해야한다는 강한 소리를 들으며 고뇌하다가 하느님의 뜻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사실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며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페르란도는 용기있게 원장에게 자신의 뜻을 알렸다. 보물처럼 아끼던 원장과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들은 극구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를 끝내 놓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된다는 생각에 그를 보내주기로 하였다. 정들었던 수사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 때 한 노인 수사가 동료들을 대표하여 자! 그럼 부디 성인이 되시오, 이 예언은 훗날 그대로 이루어졌다.
페르란도! 그를 부르는 마지막 이름이었고 나이 25세로서 가장 감정이 풍부하고 대담하던 성 아우그스티노회의 수사 신부이던 그는 이제 가난하고 초라한 아씨시의 작은형제들 틈에 끼어 수도복을 입었다. 그리고 당시 귀족들에게만 붙여지는 이름인 페르란도라는 이름을 안토니오로 개명하였다. 그 뒤 이교인이 있는 곳으로 전교 하러 가라는 명령을 고대하면서 정성을 들여 고행과 극기의 수덕에 여념이 없었다. 안토니오는 필리피노라는 수사와 모로코로 전교를 떠나라는 명을 받고 아프리카의 대륙에 도착했는데, 그 동안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않고 극기와 대제를 지켰는데, 거기에 심한 배멀미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중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당시는 신통한 의약품이 없었기에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도저히 임무수행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같이 간 수사가 판단하여 본부에 보고함으로써 즉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포르투갈로 갔다. 그렇게 열망하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을 하게된 안토니오는 모든 것이 주님이 뜻이라는 신앙 안에서 위안을 받으며 배를 탔다. 이 배는 도중에 큰 폭풍을 만나 목적하던 곳으로 가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이탈리아의 시실리아 섬에서 정착하여 안토니오는 그곳 메싸니 수도원에서 건강을 찾아 움브리아로 갔다. 뽀르지웅꼴라 총회에서 프란치스꼬 사부의 축복을 받았으며 이것이 사부님과 첫 대면이자 마지막 대면이었다.
1222년 봄, 이웃에 있는 포르리의 거리에서 프란치수꼬회 몇 사람과 도미니꼬회 수사들의 서품식에 참석하였다. 강론을 하게 되어있던 신부가 갑자기 참석치 못해 당황하고 있는 것을 본 원장은 안토니오한테 강론을 요청하였다. 복음에 관해서 연구한 적은 있어도 강론은 한번도 해본 경험이 없는 안토니오의 강론은 참으로 겸손하면서도 힘찬 웅변으로 참석자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이것은 뜻하지 않은 발견이니 이 무명의 수사가 이용가치가 풍부한 기막힌 웅변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원장 프라테그라첸은 안토니오가 기도와 극기 속에서 살아가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당시 교회가 절실히 필요했던 인재는 이교들과 투쟁하며 교리를 옹호하고 그들을 회심시키는 것이었다. 이태리 북부 이교도들은 성경 지식에 능란하여 순진한 신자들이 동요와 심한 혼란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무렵에 안토니오를 신학강사로 임명했다는 것은 유효 적절한 것이었다. 이태리 북부 이단자들은 서로 뭉쳐 단체를 조직하여 안토니오의 설교를 듣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하며 갖은 방법으로 방해하였다. 그는 이때에 사람들 앞에서 물고기들에게 설교를 하였는데 수많은 물고기가 모여들어 이상스런 소리를 내기도 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것도 있었으며 제각기 다른 형태로 주님을 찬미하는 듯 움직였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물론 안토니오의 설교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던 이단자들까지도 회두하여 처음의 착실한 신자생활로 돌아갔다. 이러한 소식은 꼬리를 물어 멀리 이웃 지방에서도 성인의 설교를 들으려 찾아왔고 이단자들도 이 젊은 설교가의 날카로운 지혜와 이론, 뜨거운 사랑으로 호소하는 부르짖음에 마음이 변하여 가톨릭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았기에 당시 사람들은 이단자의 쇠망치라는 별명을 주었다. 그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안토니오가 성서에 관해서 지니고 있는 깊은 학식과 지혜에 감탄해 “성서의 감실”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1223년에 안토니오는 프랑스 땅에 와서 특히 로와즈 강과 가론강 사이에 있는 지방에서 전교하고 있었다. 이때 슬픈 소식이 모든 프란치스꼬회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 전해졌다. 1226년 10월 4일 위대한 프란치스꼬가 뽀르지웅꼴라의 초라한 곳에서 세계적인 사랑의 찬가를 부르며 주님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오는 성신강림 때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하여 이태리로 떠났다. 1227년 총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탁월한 교리의 지식과 성덕, 그리고 웅변으로서 다른 유명한 관구장들과 의논 끝에 덕망이 있고 총명하기로 이름난 기요반니 파렌티를 총장으로 추대하였다. 총회가 끝나고 안토니오는 프랑스에 돌아가지 않고 북부 이탈리아 지방을 순회하면서 신앙과 사랑에 넘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어 마음을 바로 잡아주고, 격려하여 “평화와 착함”의 씨를 뿌렸다. 이로 인해 많은 이단자를 회두시키고 수도원을 세워 많은 젊은이들이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이때부터 이 도시는 파도바의 도시로 불리게 되었다.
프란치스꼬 수도회가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모시는 것은 세상에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인데 안토니오 성인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어린 때 깊었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성모 승천의 교리는 그의 친구 둔스 스코투스와 더불어 특별히 주장한 신덕 교리이다. 그러므로 안토니오는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숨을 거두기 전에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는 은혜와 사랑스런 어머니에게 보호를 요청하면서, 성모 찬가를 불렀다. 안토니오는 마침내 1231년 6월13일 금요일 36세의 일기로 사랑하는 파도바에서 위대하고도 조용하게 막을 내렸다. 성 안토니오를 극진히 사랑하던 아르첼라의 사람들과 파도바의 시민들 사이에는 성인의 유해를 자기네 마을에 모시려고 다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안토니오가 생전에 원하던 대로 그의 유해는 산타 마리아 수도원 성당에 안장하기로 하였다. 이 성당은 안토니오가 생전에 강론을 하고 성사를 주던 곳이다. 장례식은 장엄하여 개선 장군을 맞이하는 기념식 같았다. 안토니오는 1232년 5월 30일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하여 스폴레또 대성당에서 죽은지 1년도 안되 성인 품에 올려졌다. 이 의식에서 교황은 “지극히 착하신 박사여”하는 대송 찬미가를 읊었는데 이것은 현재 교회 박사들을 위한 찬미가이다. 성인이 죽은지 1년이 되지 않아서 성인품에 올려진 사실은 그의 성덕이 얼마나 컸던가를 교회가 증명하는 것으로 길이 교회사에 빛날 것이다.
레오 13세 교황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에게 “전 세계의 성인”이라고 붙였다. 그래서 성 안토니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적의 성인”, “파도바의 성인”이라고 알려지고 안토니오에 대한 신심은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전해졌다.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성인에게 바쳐진 성당이 있고 경당이 있으며, 성인에게 드리는 상본, 향대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성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 유물이 있는 곳에서는 지금도 그칠 사이 없이 기적이 일어나 연간 수십만씩 순례자들이 밀려들고 있다.
신자들은 성인의 거룩한 덕과 애덕의 합당한 묘지를 세우기로 하여 1263년 기초 공사를 시작한 후 1424년에 장엄한 성당이 낙성되었다. 그의 유해를 이 성당으로 옮기는 의식을 집전한 사람은 프란치스꼬회의 수도자이며 총장인 보나벤뚜라였다. 수많은 신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묘의 문이 열리고 그의 유해가 공개되었다. 죽은지 32년이 지나 그의 모든 부분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그의 혀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 확인은 1350년과 1745년에 또다시 행하였으나 그의 혀는 변함이 없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 고귀한 성당은 1749년에 일어난 화재로 회당의 일부가 불타버렸으나 전 세계로부터 보내온 헌신자들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다. 이 회당에 인접한 큰 수도원에 살고 있는 형제들은 수세기를 통하여 파도바의 성당을 지키고 있는 보호자들이 되었다.
오늘 날에 있어서도 그의 공경은 대단히 성행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주보이며, 그의 전구를 구하기 위하여 바쳐진 애긍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안토니오의 빵'을 사는 것에 사용된다.
물건을 잃었을 때 안토니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가?
그것은 성인의 성경책을 훔쳐 가지고 달아난 어떤 수련자가 성인의 기도로 그에게 다시 돌려준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성 안토니오는 1946년 1월 16일에 다시 교황에 의해서 “교화박사”라는 공식 선언을 받았다. 성상이나 상본에는 성 안토니오가 책을 들고 있는데 그것은 안토니오가 성경의 지식에 해박하다는 비유이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상본에 불꽃을 덧붙였으며, 또 15세기 부터는 심장을 그려 넣었는데 이것은 그의 뜨거운 열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합은 그의 정결을 표시하는 것이며 포루타갈에서는 백합에 십자가를 덧붙여 넣었다.
17세기부터는 안토니오가가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것으로 표시했는데, 이것은 그의 탈혼 중에 일어났던 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안토니오의 전기는 1245년 이전에 어떤 동료수사가 썼는데 이 책이 성인에 대하여 가장 확실하며 안토니오가 밖에서 한 일에 대해서는 1294년 후에 쓰여진 프란치스꼬회 수사 리무쨍의 요한이라는 전기이다. 그런데 이 전기에 전하여지는 안토니오 모습을 그린 것에 대한 자료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여기 저기에서 전하여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화사한 몸맵시를 하고 있었으며 젊었을 때 고생하던 부스럼 때문에 좀 뚱뚱해 보이기 했지만 미남 자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결론으로서 “기적의 성인”, “파도바의 성인”의 참된 영예는 그의 학식이나 웅변, 그리고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의 덕행과 거룩함 그리고 천주께서 당신의 뜻대로 그를 성 프란치스꼬회에 부르셨을 때, 기꺼이 응답한데 있다. 그는 회의 작은 규칙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창설자 프란치스꼬의 정신에 따라 그를 본받고 충실하게 이행하여 가난하고 작은 자라는 이름을 받은 프란치소꼬회의 이상을 실현시킨 것이다.
2. 연보
1188-1195 포르투갈의 수도 리수본에서 출생, 세례명은 페르디난도
1207-1208 아우구수띠노회 대성당 부속학교 입학
1209-1210 꼬임부라의 아우구스띠노회 성 십자가 수도원 입회
1218-1220 사제서품
1220 포루타갈 왕 돈 베드로가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순교한 프란치스꼬회 수사 다섯 분의 유해를 모셔왔을 때, 페르디나도는 열광적으로 환영하였고, 이를 계기로 프란치스꼬회에 입회, 수도명으로 안또니오를 받음.
1221 돗자리 총회 참석하여 프란치수꼬 성인을 만남
1221-1222 몬떼파올로 (포를리)에서 생활
1222 포를리 서품식에서 설교
1222-1224 이탈리아에서 설교
1223 프란치스꼬에 의해 신학강사로 임명
1225-1227 프랑스에서 설교
1226 아를레스 수도회의 중 설교할 때 살아있는 프란치스꼬가 발현
1227-1229 “주일강론집”(Sermones dominicales) 저술
1227-1230 로마, 롬바르디아, 마르카 관구의 관구장이 됨
1227-1231 북부 이탈리아에서 설교 빠도바에 거주
1230 수도회 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를 알현함
1230-1231 “축일강론집”(Sermones festivi) 저술 1231 사순절 기간 동안 빠도바에서 설교,
5월에 성 보니파시오성의 백작 리차르도의 석방을 위해 베로나에 있는 폭군 로마노의 에젤리노에게로 감. 그 이후로 깜뽀짬삐에로에 거주,
6월 13일 마르첼라에서 선종, 성모 마리아 성당에 묻힘
1232. 5.30 스쁠레또 대성당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서 성인품에 오름
1263. 4. 8. 성인의 유해가 보나벤뚜라에 의해 세밀히 조사됨
1350. 2.15 볼로냐의 귀도 추기경에 의해 다시 세밀히 조사됨, 성인의 턱을 성골상자에 모심
1946. 1.16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교회박사" (Dottore della chiesa) 칭호를 받음
1981. 1.16 베드로 팔라찌니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교황청 위원회가 성인의 무덤을 열고 유해를 세밀히 조사함.
3. 성 안또니오께 드리는 13일 기도
1 오! 영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죽은 자를 부활케 하는 능력을 천주께 받으셨으니 내 영혼을 깨어주사 열심하고 거룩한 생활에로 부활하게 하소서.
2 오! 지혜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성 교회의 참 빛이시며, 천상 진리의 빛으로 내 영혼을 비추소서.
3 오! 자비 지극하신 성인이시여, 고통 중에 당신께 달아드는 자를 도우심에 항상 바르시고 능하시니 내 영혼을 현재의 비애에서 구하소서.
4 오! 능력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어려서부터 지옥의 원수 이기기를 배우셨으니 내 영혼을 원수의 공격에서 막아주시고 혹심한 유혹에서 지켜주소서.
5 오! 지극히 정결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비할 데 없는 순결의 백합이시니, 불결의 지겨운 모병에 내 영혼을 한번도 더럽히지 말게 하소서.
6 오! 사랑하올 천상 의사이신 성 안토니오여, 무수한 병자들이 당신의 전달로 건강을 회복하오니, 죄로 상처받은 내 영혼을 고쳐주시고 악한 경향을 바르게 하소서.
7 오! 지극히 충실하신 성 안토니오여, 풍랑 거치른 인생 행로에 내 영혼을 지배하사 영원한 구원의 포구까지 인도하소서.
8 오! 자애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인간 재판에서 유죄 언도 받은 자들의 구속자이시니, 죄의 올가미에서 내 영혼을 해방시켜주사 떨리는 천주의 심판 받을 무리 중에 들지 말게 하소서.
9. 오! 참으로 기이하신 성인이시여, 몸에서 떨어졌던 지체들도 당신 전달로 다시 결합되어 생명을 얻은지라, 불신과 악습 때문에 떨어져나가 지체들도 다시 성 교회에 결합시켜주소서.
10 오! 지극히 고마우신 안토니오여, 당신은 잃어버린 물건을 잘 찾아주시오니 고마우신 안토니오여, 나로 하여금 성총과 천주 사랑을 죄로 잃지 말게 하시고 만일 불행히 잃는다면 즉시 찾아주시어 다시는 잃지 말게 사소서.
11 오! 사랑 지극하신 성인이시여, 젊은이도 늙은이도 당신께 달아들면 들어 허락함을 받나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나도 당신께 달아드오니 당신 사랑을 감하지 말으시고 나를 또한 들어 허락하소서.
12 오! 사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무수한 위험이 내 영혼을 둘러 샀으니, 나를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소서.
13 오! 사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빠도바의 당신 무덤 속에서 내게 요긴한 사정들을 굽어보시고, 당신 기묘하온 혀로써 천주께 말씀드리사 마침내 위로받고 들어 허락함을 받게하소서. 빌지어다, 오! 주여 당신께 달아드오니, 안토니오 성인을 공경함으로써 우리 안에 평화가 충만하고 영신이 굳세어지고 영복을 받는데 도움을 얻게 하소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홈페이지에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
12세기 말엽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성 아우구스티노 재속 사제회에 입회하여 사제품을 받은 후 아프리카 백성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고자 프란치스코회로 옮겨 갔다. 아프리카에는 가지 못했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설교가로 활약하여 대단한 성과를 거두고, 많은 이단자들을 참신앙에로 돌아오게 하였다. 자신이 속해 있던 프란치스코회에서 첫번째로 신학 교수가 되었고, 깊은 교리와 감미로움으로 가득 찬 강론집을 썼다. 1231년 파도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의 강론에서(I, 226)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합니다. 이 여러 가지 언어란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겸손, 가난, 인내 그리고 순종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이들을 실천할 때 그 실천을 통하여 여러 가지 언어를 말하게 됩니다. 행동이 뒤 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잎사귀만 있고 열매는 하나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처럼 우리도 저주하실 것입니다. 그레고리오가 말하는 것처럼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을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을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은 쓸모 없는 일입니다.
"사도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의 영이 지시하는 대로 하지 않고 성령의 감도에 따라 말하는 이는 복됩니다. 그러나 자기 영이 지시하는 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도용하여 마치 자기 말인 것처럼 넘겨줍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예레미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똑똑히 일러둔다. 예언자들이 서로 내 말을 남의 입에서 훔쳐다가 떠벌이는데 결코 그냥 두지 않으리라. 내가 똑똑히 일러둔다. 이런 예언자들이 내 말을 한답시고 혀를 놀리는데, 결코 그냥 두지 않으리라. 내가 똑똑히 일러둔다. 이런 예언자들이 개꿈을 꾸고 거짓말로 허풍을 떨어 가며 해몽을 하여 나의 백성을 속이는데, 결코 그냥 두지 않으리라. 나는 그런 말을 하라고 그것들을 보낸 적이 없다. 그것들은 이 백성에게 백해 무익한 자들이다. 똑똑히 들어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말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오관을 완전하게 하고 십계명을 준수하여 오순절(성신 강림)을 다시 성취하도록 당신 은총을 내려 주십사고 성령께 겸손히 또 열렬히 청합시다. 예리한 통회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고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혀 같은 불길을 우리 마음에 주시어, 성도들의 광채로 불타 오르고 조명되는 가운데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해주시기를 청합시다.
[금주의 성인]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St. Anthony of Padova, 6월 13일)
1195~1231. 포르투갈 출생 및 이탈리아 선종. 프란치스코수도회. 사제.
한국의 103위 성인 중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의 외국인 선교 사제들이 계십니다. 한국 국적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순교하셨기에, 한국의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한 나라의 성인이 되는 것은 출생지보다는 선종지(또는 순교지)가 어디인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포르투갈 리스보아에서 태어났지만,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기에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로 불립니다. 성인은 선종하기 1년 전인 1230년 이탈리아 파도바에 정착해 활동했습니다. 1년 남짓한 이 기간에 안토니오 성인은 파도바 시민 대부분을 가톨릭 신자로 만들었습니다. 성인의 설교를 들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성인이 믿는 하느님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성인에 대한 파도바 시민들의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성인은 원래 아우구스티노수도회에 입회해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프란치스코회 선교 사제들의 모습에 감동 받아 해외 선교 사제로 살고 싶어 프란치스코회로 수도회를 옮겼습니다. 그리곤 곧바로 아프리카로 파견됐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대신 하느님께선 그를 유럽 곳곳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당시 유럽엔 이단과 이교도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습니다. 성인은 청중들을 단숨에 사로잡는 화술로 이단에 빠진 이들을 가톨릭 교회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성인은 가톨릭 교회 가르침을 명쾌하고 단호하게 전달하면서도,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설명할 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성인은 하루에도 몇 시간씩 고해성사를 주는 데 매달리며, 회개하는 신자들을 따뜻이 품어 주었습니다.
성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갔고, 높아지는 명성만큼 위협도 뒤따랐습니다. 성인의 활동을 못마땅해 하는 이들은 성인이 먹는 밥에 독을 타기도 했고, 사람들이 성인 설교를 듣지 못하게 하려고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기적이 일어났고, 성인을 방해하던 이교도인들조차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곤 했습니다.
성인은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빚을 갚지 못해 고리대금업자에 시달리거나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다니며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파도바에선 성인이 청원하면 빚을 진 이들을 구제해주는 법이 만들어졌다고도 합니다. 성인은 선종한 지 1년 만에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고, 1946년 교회학자로 선포됐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7일, 박수정 기자]
참고자료
■ 고종희 저, 명화로 읽는 성인전(알고 싶고 닮고 싶은 가톨릭성인 63인) - '파도바의 안토니오', 서울(한길사), 2014년, 444-451쪽.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18-120쪽. ■ 베르질리오 감보소 저, 김익자 · 강은성 역, 기적의 일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서울(성바오로), 2015년.
■ 스테파노 델오르토 저, 강선남 역,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서울(바오로딸), 2003년.
■ 최익철 저, 우표로 보는 교회를 빛낸 분들 - '안토니오', 서울(으뜸사랑), 2014년, 109-113쪽.
■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파두아의 안토니오 성인',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95-99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8권 - '안토니오, 파도바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1년, 5836-5839쪽.
■ 황정윤 저, 이승문 그림, 성 안또니오, 서울(성황석두루가서원), 1990년.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파도바의 성안토니오 사제 학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41-143쪽. EndFrag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