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성 예레미야(Prophet Saint Jeremiah)
축 일 : 5월 01일
신 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지역 : 이스라엘(ISRAEL)
활동 년도 : 650-588년경BC
같은 이름 : 예레미아, 예레미아스, 제레미, 제레마이아
성 예레미야(Jeremias)는 구약성서 예언서 중 하나인 예레미야서의 저자이다. 만일 성서에 이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는 그 종교적 본질을 아주 달리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마음과 인격의 종교를 주창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보다 1세기 뒤에, 그러니까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 근교의 어느 사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성서는 예레미야의 생애와 성격을 그 어느 예언자들 보다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예레미야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이 성서에 다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 그러니까 요시야 왕 치세 제13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젊은 예언자로 나섰다(예레 1,2). 그는 유대왕국의 멸망이 예견되었고 드디어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초래한 비극적 시대를 살고 있었다. 요시야왕의 종교개혁과 주권회복은 유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609년에 그 왕이 므기토에서 전사하게 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고대 중동의 세계는 또다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으니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612년에 함락됨으로써 바빌론제국이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은 팔레스티나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유대왕국을 사주하여 바빌론의 지배에 항거하도록 하였으니, 느브갓네살은 59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였고 주민의 일부를 유배지로 끌고 갔다. 이집트의 조종에 끝내 놀아난 유대는 또다시 바빌론 세력에 항거하였다. 587년에 바빌론 군대는 한 번 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깡그리 파괴하였고 저항세력의 지도자들을 또다시 유형지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 어두운 시대의 역사적 비극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이 비극을 좌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는 지도자와 민중에게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로 나서서 맹렬히 설교했고 위협했으며 왕국의 몰락을 예고했던 것이다. 다윗의 왕좌를 차지했던 유대의 왕들은 예언자의 이 불칼 같은 경고를 아예 무시했으며 또 군인들은 예레미야가 패배주의를 선동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박해하고 고문하며 투옥시키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강기슭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시편 137)에게서 희망을 보았지만 망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고 고국 땅 팔레스티나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의 보호자는 바빌론인들이 임명한 총독 게달리야였다. 하지만 유태인의 한 무리가 총독을 암살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바빌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레미야를 인질로 삼아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것 같다.
이 험난한 운명의 사나이의 드라마는 단순히 사건들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전 생애가 일종의 비극이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까지 그 말씀에 충실하다 보니, 예레미야는 그야말로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가 되고만 것이다. 그는 성품이 온순했고 사랑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야훼는 그에게 ‘무너뜨리고 파괴하며 전복하고 없애버리는’ 사명(1,10)을 주셨다. 그의 예언은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였다(20,8). 예레미야는 평화를 원했건만 자기 가족과 왕들과 사제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과 모든 민중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예레미야는 “온 나라 안에서 싸움과 불화의 사나이로 통한 것”이다(15,10). 그가 이 같은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예레미야는 말씀에 의해 완전히 가루가 될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20,9). 하느님과의 내적인 대화는 온통 고통의 외침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의 고통은 끝이 없나이까?”(15,18) 욥의 저주를 예고한 예레미야의 그 외침은 고백론의 절정이다. “내가 태어난 그날은 저주받을지어다!”(20,14 이하).
하지만 이 고통은 예레미야의 영혼을 정화시켰으니 하느님과의 내밀한 친교를 가능케 하였다. 우리에게 이 예언자가 그토록 귀중하고 가까운 인물로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성문화시켜 예고하기에 앞서(31,31-34) 자신이 먼저 마음의 종교와 내적인 종교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인격적 종교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심화시켰다. 하느님은 마음과 콩팥을 꿰뚫어 보시는 분(11,20)이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다(31,29-30). 하느님과의 우정은 인간의 거짓스러운 마음의 소산인 죄에 의해 끊어진다. 거짓말이 모든 죄의 뿌리란 것을 예레미야만큼이나 강조한 사람은 없다(4,4; 17,9; 18,12). 이 점에 관한 한 예레미야는 호세아 예언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율법은 그에 의해 내면화되었으며 또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는 마음의 소산임을 그가 밝혔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인간의 개인적 인격에 큰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아 신명기(申命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물론 그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왕의 개혁을 처음에는 환영하였으나 마음의 회개가 없는 제도적 개혁이 무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민중의 윤리적 종교적 삶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내적 인간의 개조 없이는 불가능함을 예레미야가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살아생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으나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마음의 종교에 기초를 둔 ‘새로운 계약의 사상’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유다이즘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에제키엘서와 제2 이사야서(40-55)와 시편들에서도 그의 영향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마카베오 시대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민족의 수호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꼽았다(2마카 2,1-8; 15,12-16).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느님과 맺은 내밀한 관계를 밝혔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한다. 말씀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말씀 때문에 당한 그의 고통은 이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모습을 예고하였으니,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앞질러 보여 준 것이다.
[가톨릭 홈]
[성서의 세계] 예언자 예레미야 - 말씀의 예언자 예레미야 - 시대적 상황과 소명
송재준(마르코)|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당신의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15,16)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나이다.” (20,9)
하느님의 말씀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있어 진정 ‘존재의 이유’요, ‘삶 바로 그 자체’였다. 처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 말씀을 접했을 때 체험했던 충만한 기쁨, 그리하여 열정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였으나 그들의 냉담한 반응과 비웃음에 겪어야만 했던 좌절과 실망, 그로 인해 심각하게 제기되었던 예언자 직분에 대한 갈등, 나아가 말씀에의 확신과 신앙 그 자체를 뿌리채 뒤흔들었던 혼란과 회의, 하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절망의 과정을 겪으면서 새롭게 체험하게 된 하느님의 깊은 사랑과 깨닫게 된 말씀의 심오한 의미! 이처럼 예레미야는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고, 말씀과 함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예언자로서 성숙해 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특별히 ‘말씀’의 예언자라 불리운다.
1. 예언자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아나돗’에서 사제인 힐키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은 요시야 임금(기원전 640-609년)이 다스리던 기원전 627/6년경으로 당시 예레미야는 20대의 젊은 나이였다. 그후 그는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기원전 587년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의 긴 기간동안 예언직을 수행하게 된다. 왕국의 멸망 후에는 감독관 게달리야를 살해한 일단의 주전파(主戰派)들에 의해 이집트로 잡혀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동족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생애와 선포말씀을 전하고 있는 예언서의 내용들은 그가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살았던 ‘말씀의 예언자’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그 유명한 다섯 개의 예레미야 고백록을 통해 그가 예언자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겪었던 갈등과 회의를 만나면서 진솔한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며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생수(生水,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저버리고 마음이 갈라졌던 이스라엘에 대한 질책의 말씀은 우리의 충실치 못한 삶을 반성하게 하며, 영원한 계약에 대한 그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써 맺으시게 될 결정적인 새로운 계약을 향한 전망을 제시해주고 있다.
2. 활동시기와 시대적 상황
예언서의 내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이 선포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40년에 걸친 예레미야의 활동을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여 관련된 성서 텍스트와 각 시기의 시대적 상황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소명과 첫 번째 활동시기(기원전 627/6년-622년)
예레미야가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기원전 627/6년경의 남왕국 유다는 종교적인 타락과 사회,정치적 불안이 만연했던 때였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요시야 임금이 아직 본격적인 통치를 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선대(先代) 므나쎄 임금(기원전 687-642년) 시대의 혼란했던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실상 므나쎄 임금 때 왕국이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그 결과 사회적인 혼란과 함께 강대국의 이방종교들이 유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도 참된 야훼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혼합종교주의에 물들어 갔으며, 하느님께서 삶의 근본 규범으로 주셨던 사랑의 계명들을 실천하지 못하고 부정과 불의에 빠져들게 된다.
바로 이러한 때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1장) 예언자 예레미야는 당시 혼합 종교와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던 백성들을 질책하면서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동시에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와 참된 하느님 백성으로서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2-6장) 한편 하느님께서 새롭게 맺으시고자 하는 새로운 계약을 통해 남왕국 유다 뿐 아니라 이미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던 북왕국 이스라엘도 함께 하나의 하느님 백성으로서 구원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기도 한다.(30-31장)
그후 기원전 622년 요시야 임금에 의해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이 단행되자 예레미야는 약 10여 년간 활동을 멈추고 휴지기를 가지게 된다.
2) 두 번째 활동시기(기원전 609년 이후 몇 해)
기원전 609년 요시야 임금이 이집트 파라오 ‘느고’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새로운 임금으로 여호야킴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는 선대의 종교개혁과 자주적 독립을 위한 시도들을 이어가지 못하고 다시금 이스라엘을 혼란 속에 빠뜨린 악한 임금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등장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재개토록 하게 된다.
이때 예언자는 임금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의 박해 가운데 외로이 그러나 굳건하게 그들의 불의를 고발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심판을 선포한다.(7-26장; 35-36장) 특히 성전에 대한 당시의 맹목적인 신뢰를 질책했던 선포(7장, 26장)와 함께 예언자의 고백록(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이 나온 것도 바로 이때이다.
한편 예레미야는 당시 혼란했던 이스라엘과 관련을 맺고 있던 주변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기도 하였다.(46-51장)
3) 세 번째 활동시기(기원전 594년-587년)
예레미야의 세 번째 활동은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임금인 시드키야 제위 제4년부터 왕국이 멸망한 기원전 587년까지 펼쳐지게 된다. 이때 예언자는 임금의 무능함과 함께 당시 친 바빌론파와 친 이집트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던 왕국의 분열상을 고발하면서 이스라엘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죽음을 무릅쓰고 선포한다. 그러나 예언자의 말에 귀를 닫고 듣지 않았던 그들은 마침내 기원전 587년 예레미야가 경고한데로 멸망하게 된다. 한편 예언자는 왕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섰던 이 시기에 미래에 다가올 구원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와 관련된 내용은 27-29장, 32-34장, 37-39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4) 마지막 활동시기(기원전 587년 이후)
예레미야는 왕국을 멸망시킨 바빌론에 의해 감독관으로 내세워진 게달리야가 암살된 직후 그의 서기인 바룩과 함께 친 이집트파에 의해 이집트로 끌려가게 된다. 여기서도 그는 난을 피해 이주해 온 동족들을 격려하며, 우상숭배의 위험에 직면해 있던 그들의 회개를 촉구한다. 이처럼 예언서는 예레미야가 마지막까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해 봉사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3. 예언자의 소명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도구로서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는 예언서의 첫 부분에서 전해주고 있다.(1,4-19) 하느님의 소명은 예언자의 전 삶을 지배하는 결정적인 체험으로서 여기에는 부름받은 이의 신앙과 예언자로서의 정체, 그리고 수행해야 할 사명 등이 묘사되고 있다.
먼저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이렇게 내렸다.”(4절)는 표현은 예언자가 하느님 말씀의 사람임을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이 말씀의 체험은 이제 예레미야의 삶에 결정적인 전기를 가져오게 되며, 그가 겪게 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심화되고 성장해 나가게 된다.
이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그를 원초적으로 선택하셨으며, 이스라엘을 넘어서 뭇 민족들도 포함하는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세우셨음을 밝히신다. 물론 예언자는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에게로 파견된 이들이다. 그러나 “민족들의 예언자”란 표현을 통해 1) 당시 이스라엘의 운명이 주변의 강대국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었던 시대적 상황과 2)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의 참된 주인이시라는 신학적 사상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레미야는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6절)라고 주저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의 사명에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부담스러워 하며, 회피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들의 태도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당신 도구로서의 선택은 인간 생명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의 전적인 권한이다.
이어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를 보내면 너는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7절)고 이르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가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자세를 제시해준다. 즉 하느님의 사람은 자신이 선호하고, 자신에게 편한 이들만이 아니라, 비록 생각을 달리하고, 그를 미워하며 심지어 박해하는 이들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누구에게나 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말이나 자신이 판단하기에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말이 아니라, 비록 청중들이 듣기 싫어하고 외면하는 말일지라도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이면 무엇이나 충실히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말씀을 전할 때 예레미야가 겪게 될 상황을 예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주겠다.”(8절)고 약속해 주신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예언자로서의 직무와 권한을 맡기신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준다.”(10절) 그리고 예언자로서 수행할 사명이 “뽑고 허물며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는” 것임을 제시해주신다. 전반부의 네 개념은 예레미야가 선포해야 할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의미하며, 후반부의 두 개념은 구원의 메시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어 두 개의 환시가 제시되는데 첫 번째 환시(11-12절)는 ‘지켜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히브리어와 유사한 ‘편도나무’란 개념을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지를 지켜보고 계실 것임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북쪽에서 쏟아질 듯 기울어져 있는 끓는 냄비의 환시(13-16절)는 이스라엘의 죄를 응징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이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강대국에 의해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소명이야기의 마지막 부분(17-19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예레미야에게 당신께서 함께 해주실 것임을 약속하시면서 그를 백성들에게 파견하신다. 여기서 진정 예언자가 두려워 할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한 분뿐임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언자 직분의 원천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하겠다.
[월간 빛, 2002년 9월호]
예언자 예레미야(2) - 예레미야의 선포 메시지와 고백록
송재준(마르코)|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준다.... 뽑고 허물며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기 위함이다.” (예레 1,9-10)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시면서 그의 입에 담아주신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당시 남왕국 유다의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올바른 생활을 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의 경고(‘뽑고 허물며 없애고 부수며’), 하지만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구원하시리라(‘세우고 심기 위함’)는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1.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경고
1) 광야시절의 하느님 백성
먼저 예언자는 그 옛날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절실하게 체험했던 광야시절을 회상한다. 목말라하던 그들에게 물을 주시고, 배고픔에 울부짖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내려주셨던 하느님, 끝없이 펼쳐지는 광야 길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끌어주시고 보호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였던 광야시절! 이스라엘이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따랐던 그 시절을 예레미야는 ‘신혼시절’이라 표현한다.(2,2) 나아가 그때 이스라엘이 “주님께 성별된 그분 수확의 만물”(2,3)로써 하느님께 드렸던 순정과 사랑을 후손인 지금의 남왕국 유다 백성들도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2) 남왕국 유다 백성들의 삶
그러나 예레미야 당시 남왕국 유다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던가? 과연 하느님의 참된 백성으로서 그분께 충실한 삶을 살았는가? 그렇지 못했던 백성들의 삶을 예언자는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2,8) 먼저 하느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의 친교와 일치를 이루는 제사를 주관하며, 스스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사제들이 “주님께서 어디 계시는가”하고 찾지도 않을 뿐더러 그분을 몰라본다. 그리고 하느님의 율법을 날마다 읽으며 하느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 그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들을 돌보아야 할 목자(임금에 관한 규정인 신명 17,14-20 참조)들은 오히려 하느님께 반역하고 있으며, “제 부정한 이익을 돌보고 무죄한 이의 피를 흘리며 억압과 폭력을 일삼는 일에나 쏠려 있다.”(22,17) 또한 하느님께서 입에 담아주신 말씀을 그분의 이름으로 전해야 할 예언자들은 우상인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거나 “거짓 환시와 엉터리 점괘와 제 마음에서 나오는 거짓말”(14,14)만 늘어놓고 있다. 나아가 일반 백성들도 성전에서 이방 신들을 섬기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웃들을 속이고 부정과 불의를 일삼는다.: “모두가 제 이웃을 속이고.... 약탈에 약탈을, 거짓에 거짓을 더하며 그들은 나를 알아모시기를 거절한다.”(9,3-5) 이러한 백성들의 그릇된 삶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저버린 결과임을 예언자는 지적하고 있다. 비록 이방인들이 하느님이 아닌 우상들을 섬길지라도 제 신들을 바꾸지 않는데, 이스라엘은 참된 神이신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란 영광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과 바꾸었던 것이다.(2,11) 결국 이스라엘이 저지른 악행은 生水(참된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저버린 것이며, 제 자신을 위해 마음이 갈라져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웅덩이”(2,13)를 판 것이다.
3)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림
이러한 백성들의 삶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탄생했던 시나이 계약을 스스로 깨뜨려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예레미야는 선포한다.(11,1-17) 본래 시나이 계약은 쌍무계약(雙務契約)이다. 다시 말해서 시나이 계약은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하느님께서 삶의 규범으로 일러주신 십계명을 지키겠다고 맹세함으로써 맺어진 계약으로써, 이제 이스라엘은 십계명의 내용인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구원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는 계약의 한 당사자이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언제나 한결같이 시나이 계약에 충실하셨음을 증언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는 광야여정을 마친 이스라엘로 하여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도록 손수 이끌어 주셨고(여호수아서), 이방민족의 손에 넘어가 울부짖을 때 판관들을 통해 구원해주셨으며(판관기), 왕조시대에는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그릇된 길로 들어선 이스라엘이 당신의 참된 백성으로 돌아오도록 배려하셨던 것이다(예언서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우상숭배에 물들어 세상이 주는 즐거움만을 추구하고 자기 중심의,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삶에 집착하고 만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 예레미야는 “사람들은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지 않느냐? 누구나 빗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이 예루살렘 백성은 한 번 빗나가면 배반을 고집하느냐?”(8,4-5)고 질타한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삶이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들의 조상과 맺으셨던 계약을 깨뜨려버렸음(11,10)을 선언하게 된다.
4) 깨어진 질그릇과 성전 파괴 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이 맞게 될 운명이 ‘깨어진 질그릇의 비유’(19장)를 통해 예고된다. 여기서 질그릇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그리고 예언자가 질그릇을 깨뜨려버리는 행위는 하느님 말씀 듣기를 마다하고 목덜미를 뻣뻣하게 한(19,15)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방인의 손에 의해 넘어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유배생활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레미야가 행한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을 이해할 수 있다.(7장, 26장) 당시 바알에게 분향하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며, 도둑질과 살인, 간음과 거짓 맹세를 일삼으면서도 ‘성전’에 와서는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안도하며 자기 기만에 빠져 있던 백성들에게 성전이 그들의 보호막이 되어줄 수 없음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곳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구원의 원천이라는 믿음이며, 하느님의 가르침을 구체적인 삶 안에서 구현하는 실천적 삶임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하여 예언자는 무엇보다 구체적인 삶의 쇄신과 변화를 강조하며 선포한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7,3)
2. 예레미야의 고백록
예레미야는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간직하였던 예언자로서 그들이 진정 참된 하느님의 백성으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잘못된 삶을 질책하고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의 말을 외면하고 조롱하였으며, 당시 지도층인 여호야킴 임금이나 성전 파괴예언에 격렬히 분노했던 사제들은 심지어 예언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박해를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인간적인 고독과 아픔, 자신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행했던 예언직에 대한 회의, 나아가 하느님께 대한 원망과 함께 신앙의 위기를 심각하게 겪게 된다. 한 인간으로서, 예언자로서, 신앙인으로서 예레미야가 겪어야만 했던 칠흑과 같은 어두운 밤 그리고 갈등과 회의의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새롭게 발견하고 체험하게 되는 과정을 우리는 그의 다섯 고백록에서 만나게 된다.
첫째 고백록(11,18-12,6)에서 예레미야는 순한 어린양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반당하여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예언자는 실망과 좌절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 공정하게 판단해 주실 것을 청한다. 또한 악인들과 배신자들의 삶이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성공한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에 갈등하며 하느님의 공정성에 대한 회의를 제기하나, 하느님께서는 이에 대한 위로나 해명 대신 흔들림 없는 단호한 삶의 자세를 촉구하신다.
둘째 고백록(15,10-21)에서 예레미야는 정의롭게 살아온 자신이 모든 사람의 지탄을 받고 있는 처지를 한탄하면서 처음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받아먹었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을 회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호소하면서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을 간절히 탄원드린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로서의 직분에 충실해야 함을 이르시면서 당신께서 함께 계시리라 약속하신다.
셋째 고백록(17,14-18)과 넷째 고백록(18,18-23)은 “주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나? 내려와 보시라지!”(17,15)라고 조롱하는 이들과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나 무시해 버리자.”라고 선동하며 예언자를 없앨 음모를 꾸미는 이들에 대해 예레미야는 다시 한번 하느님의 공정을 호소한다. 여기서는 또한 지금 그를 박해하는 이들에 대해 예언자가 가졌던 사랑이 잘 드러나기도 한다.
다섯 번째 고백록(20,7-18)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은 하느님의 꾐에 넘어가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음을 원망한다. 그리고 가장 친한 벗들로부터 버림받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였던 예언자는 ‘뼛속에 가두어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름’을 체험하게 된다. 마침내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확신하며 하느님을 찬양하게 된다.
3. 새로운 계약의 구원 선포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타오르는 불빛이 더욱 밝게 비추어지듯이 남왕국 유다의 절망적인 상황 안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새롭게 맺으실 계약을 선포하면서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 주고 있다.
먼저 예언자는 자신의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언젠가 다가올 구원을 암시하고 있다.(32,1-15) 여호야킴 임금의 박해로 감옥에 갇혀있던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고향 아나돗의 땅을 정식 계약을 맺어 산다. 그러나 이 매매는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감옥에서 나갈 희망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더욱이 왕국을 위협하던 외국군대에 의해 점령된다면 이전 맺은 계약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비록 이스라엘의 잘못된 삶으로 하느님의 심판이 내리겠지만 언젠가는 하느님 백성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예언자는 백성들의 죄악에 의해 깨어졌던 계약을 하느님께서 새롭게 맺으시게 되리라고 선포한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갈려진 마음을 가졌던 이스라엘에게 한마음과 한길을 주시며 영원한 계약을 맺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속에 당신께 대한 경외심을 심어 주어 그들이 당신께로부터 돌아서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는 것이다.(32,39-40) 여기서 ‘한마음’을 주심은 곧 당신께 대한 참다운 경외를 심어 주시는 것이며, 이것은 당신께 대한 순종과 존경 그리고 사랑의 자세를 말한다.
이러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새로운 계약에 대한 전망은 마침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새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실현되게 될 것이다.
[월간 빛, 2002년 10월호]
[성서의 세계 - 구약] 예레미야 : 심판의 나팔 소리
다마수스 빈첸
예레미야는 자기 동포들에게 참회를 촉구하는 열정적인 설교자였다.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동포들의 죄상을 밝혀 내는 통렬한 고발자였다. 그의 생애 또한 구약 성서 안에서 수난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장 충실하게 그려 주고 있다. 예레미야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첫째 부분은 예언자의 시와 연설들을 담고 있다(1-25장). 둘째 부분은 예레미야의 서사 바룩이 쓴 것으로 보이는 보고서로서, 저 유명한 성전 연설(기원전 609년) 시대부터 에집트 귀양살이에 이르기까지 예레미야 예언자의 활동을 기술하고 있다(26-45장). 셋째 부분은 외국 민족들에 대한 예언들을 수집해 놓은 것이다(46-51장). 52장은 일종의 역사적인 부록으로서 열왕기 하권 25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예레미야서를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때로는 보속 거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면면에 넘쳐 흐르는 슬픔과 비탄이 읽는 사람을 침울하게 만든다. 예레미야서 자체가 그 책이 쓰여지던 시대처럼 온통 뒤죽박죽이어서 사람을 혼동하게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서를 쉽게 이해하려면 열왕기 하권 21-25장을 먼저 읽어 두는 것이 좋다. 거기에 예레미야 예언서의 역사적인 배경이 기록되어 있다. 북부 왕국 사마리아(이스라엘)가 아시리아 제국에 합병된 후 남부 왕국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다. 그때 아시리아인들의 종교 봉행이 공식적으로 권장되었다. 하지만 아시리아 제국이 쇠퇴하고 새로운 침략자들이 밀려드는 틈에, 거룩한 왕 요시아는 잠시나마 독립의 기회를 얻어 국민 생활을 일신하고자 신명기의 노선에 따라 종교 개혁을 시도한다. 요시아는 에집트인들과 싸우다 죽고, 세계 지배를 꿈꾸는 갈대아인들의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북쪽을 그리고 에집트가 남쪽을 지배한다. 유다는 이제 바빌론 왕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예레미야는 요시아가 아직 예루살렘을 다스리고 있을 때인 기원전 627년에 예언 직무에 대한 소명을 받는다. 그때 그는 나이 스무 살의 청년으로서 베냐민 지방 아나돗에 사는 한 사제의 아들이었다(1,1). 그 예언 역정의 첫번째 시기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자 하였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변절을 고발하기 시작하며, 주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하였다(2,1-4,4). 그의 호소가 묵살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북쪽의 적군들을 통하여 징벌이 내릴 것이라고 백성들을 위협하였다(4,5-6. 30).
요시아가 종교 개혁 과정에서 지방의 산당들을 폐지하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민족의 예배를 집중시킬 때에, 예레미야는 아나돗을 떠나 수도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위로부터 강요되는 요시아의 개혁이 백성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8,8). 요시아가 죽은 다음 여호야킴의 통치 초기에 예레미야는 그 사명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그는 백성들에게 외적인 제도를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저 유명한 “성전 연설”(7장; 26장)에서 그는 성전을 안녕의 상징으로 믿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성전은 파괴되고야 말 것이라고 예언할 때,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죽여 버리려고 하였다. 수세기가 지난 후 예수께서도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실 수밖에 없었다(마르 14,58).
예레미야는 “옹기장이집의 설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녹로를 돌리며 일하는 옹기장이를 보았다. 옹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 내다가 제대로 안되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다시 빚는 것이었다. 그때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스라엘 가문아, 내가 이 옹기장이만큼 너희를 주무르지 못할 것 같으냐?”(18,6). 성전뿐 아니라 온 나라의 완전한 파괴만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이 예레미야의 마음속에 일어났다. 그는 장로들과 사제들이 보는 앞에서 오지그릇 하나를 팽개쳐 부수며 말하였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 옹기그릇이 부서져 다시는 주워 맞추지 못하게 된 것처럼 나는 이 백성과 이 도읍을 그렇게 부수리라”(19,11).
이제부터 예레미야가 갈 길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유다의 죄는 정으로 새겨져 있다. 뾰족한 차돌로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17,1)고 확신한 그는 하느님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선포하였다. “나는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이 도읍은 바빌론 왕의 수중에 들어가서 불에 타 없어지고 말리라”(21,10). 예레미야 자신도 자기에게 부여된 사명이 너무나 힘겨워 극심한 고뇌에 빠져들었다.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복과는 거리가 먼 날, 어찌하여 모태에서 나와 고생길에 들어서 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 이렇게 수모를 받으며 생애를 끝마쳐야 하는가!”(20,14. 18; 6,19-20 참조). 예언자의 내적 고통은 원수들의 박해를 통하여 더욱 더 깊어져 갔다. 여호야킴 왕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적힌 두루마리를 불살라 버렸다. 예언자와 그 서사 바룩은 몸을 숨겨야만 했다(36장).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졌다. 느부갓네살에게 반기를 든 여호야킴은 굴욕적인 죽음을 당하였고(22,13-19), 그 후계자 여호야긴도 양민들과 더불어 바빌론으로 추방당하였다(13,18-19,24).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의 예언(25,12; 29,10)에 따라 칠십 년 동안 지속될 바빌론 포로생활의 시작이었다(기원전 597년).
느부갓네살은 시드키야를 유다의 왕으로 삼았다. 그는 본래 사악한 사람으로서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민족의 영광을 외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넘어가 느부갓네살에게 반기를 들었다(21장; 23,9-40). 이리하여 예루살렘은 기원전 588년 갈대아인들에게 포위를 당한다. 이 두번째 포위에 관한 기록은 21장과 32-34장, 37-38장에 들어 있다. 예레미야의 투쟁은 이때 그 극에 달한다. 그는 거듭 항복을 권유하다가 패배주의자로 몰려 웅덩이에 처박히고 말지만, 에디오피아인 내시에게 구출된다. 기원전 586년 7월, 마침내 도성은 함락되고, 왕은 붙잡혀 눈알이 뽑힌다. 온 성읍과 성전이 불에 타 무너진다(39장). 그러나 예레미야는 정복자들에게 존경을 받아 아무데나 갈 수 있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남아 있는 백성들과 함께 머물렀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옹기그릇은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이제 새날이 동터 오는 것 같았다. 예레미야와 친분이 두터운 게달리야가 유다 총독이 되었다. 30장과 31장, 39-44장이 이 기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예레미야서 가운데 이 대목이 가장 아름답고도 위로가 넘치는 예언들을 담고 있다. 예레미야는 새로운 계약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폐허의 도성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가는 길고 긴 난민의 대열을 바라보며, 그는 이렇게 외쳤다. “칼부림에서 빠져 나온 백성이 사막에서 나의 은혜를 입었다. 안식처를 찾아 나선 이스라엘에게 나 야훼는 멀리서 나타나 주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워 주리라”(31,2-4). 피난민의 무리가 비탄 속에 모여 사는 라마에서, 예레미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거두어라. 밝은 앞날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31,16-17). 그 다음 구원 역사의 이정표가 될 새로운 계약에 대한 장엄한 선포가 뒤따른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 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 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라”(31,31-34).
예레미야의 역정에서 절정이라 할 이 예언은 그의 생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달리야는 과격 분자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40-41장). 느부갓네살의 진노가 두려워, 그 가련한 잔류민들은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42장) 에집트로 도망을 친다. 예언자는 열정에 넘치는 최후의 호소로 “하늘의 여왕”에게 제주 바치는 것을 막아 보려고 하였다(44장). 예레미야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백성들의 신앙은 지상의 복락만을 찾는 “기복 신앙”이었다. 예레미야의 잔은 이제 가득 찼다. 믿을만한 전설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자기 동포들이 돌로 쳐죽였다고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불굴의 증인 곧 진정한 순교자의 죽음이었다. 얼마 가지 못하여 예레미야의 마지막 예언이 이루어진다. 에집트가 느부갓네살의 수중에 떨어지고, 하느님의 말씀에 부질없이 대들었던 유다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은 처참한 비극으로 그 종말을 고하고 만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황폐해지리라”(마태 23,37-38).
예레미야는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람인가?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에 있어서 공동체의 예속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사람이며, 자신의 내밀한 종교적 감정을 충실하게 기록하였던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생명이 없는 의식(儀式)의 횡포로부터 정신의 자유를 찾고자 싸웠던 위대한 투사의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우리 현대인들 가운데 살아가는 위대한 진보적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평생 동안 하느님의 말씀은 그를 압도하는 유일한 열정이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고, 야곱은 축복을, 모세는 지팡이를, 다윗은 도유를 받았다. 이사야는 불덩이로 입술을 정화시켰고, 에제키엘은 두루마리를 삼켰었다. 주님께서는 손을 뻗쳐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이르셨다. “나는 이렇게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담아준다.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1,9-10). 이는 바로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레미야를 붙잡으신 분은 바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이셨다. 예언자의 마음과 하느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처럼 이렇게 심오하고도 내밀한 일치를 이루었던 예언자는 없었다. 말씀은 그의 힘이었고 또 그의 십자가였다. 예레미야는 인간의 단순한 꿈이나 염원을 결코 하느님의 말씀과 혼동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바위를 부수는 망치”(23,29)와 같았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심판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죄상 곧 변절과 허영을 가차없이 비난하였다. 그의 말은 회개와 참회를 촉구하는 심판의 나팔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고난받는 종,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종의 모습을 보여준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대인 편역)
[경향잡지, 1989년 6월호]
[성서의 세계 - 구약] 가혹한 운명의 예레미야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지극히 인간적으로 인내한 사람
구약의 사제들이 잠 짜여진 규정에 따라 예루살렘의 성전과 제단에 결속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신약의 성전은 성소에서 아주 정확하게 자신의 전례 임무를 완수한 즈가리야 사제로 시작된다. 예수의 한 비유로부터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에 폭행과 약탈을 당한 여행자를 본 사제가 다음과 같은 간단한 말로 냉정하게 그 성격이 묘사되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사제는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가버렸다”(루가 10,31). 어쩌면 그 사제는 단 하나의 과제, 즉 성전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만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사제 마을 아나돗 출신인 구약의 사제 예레미야의 생애는 전혀 달랐다. 이전의 대사제 에비아달이 아나돗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예레미야가 숙부 살룸의 밭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그가 사제 에비아달의 후손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는 시골에 거주했으면서도 때때로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직분을 수행했다.
그의 소명과 관련 있는 두 가지 환시에서, 예레미야에게는 이러한 말로 예언 사명이 맡겨졌다.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예레 1,5). 따라서 그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언직에 임명되었고, 어른이 되어 정확한 임무를 받았다. “유다의 임금이나 고관들, 사제들이나 지방 유지들과 함께 온 나라가 달려들어도 내가 오늘 너를 단단히 방비된 성처럼, 쇠기둥, 놋담처럼 세우리니……”(예레 1,18).
이러한 임무를 받은 뒤 성전에 나타난 예레미야는 용기를 내어 사제 계급과 거기에 참석해 있던 백성들을 공격했다. 그는 의식 규정을 알았으나 그것이 겉으로만 준수되는 것을 보았다. 또한 기도와 희생에 내적인 태도와 종교 생활이 부합하지 않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그는 대문의 계단에 서서 군중에게 비난과 빈정거림이 섞인 채찍을 휘둘렀다. “너희는 훔치고 죽이고 간음하고 위증하고 바알에게 분향하고 있다.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쫓아와 나의 앞에 서서 살려 주셔서 고맙다고 하고는 또 갖가지 역겨운 짓을 그대로 하고 있다”(예레 7,9-10). 따라서 설교는 성전의 파괴와 곧 닥칠 유배를 선포함으로써 끝났다.
나아가 근동의 모든 사절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는 상징적인 행위로도 설교했다. 언젠가 그는 옹기장이에게서 작은 오지그릇을 샀고 그것을 머리에 이고 아무 말 없이 예루살렘의 길을 따라 떠났다. 호기심 많은 집단은 그를 지켜보고 따라갔다. 옹기장이 집에 도착한 그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며 가름단지를 박살냈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 옹기 그릇이 부서져 다시는 주워 맞추지 못하게 된 것처럼 나는 이 백성과 이 도읍을 그렇게 부수리라”(예레 19,11). 또 언젠가 그는 쇠멍에를 메고 떠돌게 되었다.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나는 이 모든 민족에게 쇠멍에를 메워서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리라”(예레 28,14).
이러한 독특한 행동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의 생애 전체도 계속적인 참회의 설교였다. 하느님은 그에게 분명히 독신으로 지내고 가정을 이루어 살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가정은 흩어지고 모두가 포로로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예레 16.l-4).
하느님은 또한 그에게 당신의 백성에 대한 자비가 끝났음을 일러주려고 상복을 입거나 초상집에 가는 것을 금하셨다(예레 16.5-7). 또한 축제가 벌어지는 잔칫집에 참석하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 나라에서 기쁨과 즐거움의 목소리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예레 16.8-9).
예레미야의 이러한 설교는 백성에게, 그리고 그보다는 그들의 우두머리들에게 더 잘 이해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예언자를 감금하고, 형벌을 주고, 속박하고, 굶어 죽게 하려고 물이 없는 우물에 던졌다. 그는 이렇게 자기 생애 동안 그의 백성에게 닥칠 재난을 최초로 견디어 냈다. 이것 역시 그의 예언적 사명의 일부였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과 이렇듯 긴밀히 연결된, 고통으로 가득 찬 이러한 생애는 예레미야서에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일부는 그의 스승의 고통을 예리하게 조사하고 그에 대해서 삼인칭으로 기록할 수 있었던 예레미야의 제자 바룩에 의해 쓰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다른 부분들은 일인칭으로 쓰여졌고 예레미야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죽을 때까지 박해받은 한 인간에 대한 표현이요, 하느님을 향한 토로이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자신의 소명 안에서 몹시 괴로움을 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에 대하여 완화해 줄 것을 호소하는 기도이다. “이 괴로움은 왜 끝이 없습니까? 마음의 상처는 나을 것 같지 않습니다”(예레 15,18).
그러나 더욱 깊은 상처, 예언자의 마음을 다른 무엇보다도 쓰라리게 한 것은 비극적으로 수많은 역경에 부닥친 백성들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고통은 하느님의 무서운 금지령에서 더욱 분명하게 감지된다. “너는 이런 백성을 너그럽게 보아 달라고 빌지 말라. 용서해 달라고 울며불며 기도하지도 말고, 떼를 쓰지도 말라. 나는 너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으리라”(예레 7,16). 예레미야의 고뇌는 무익했다. 왜냐하면 백성들 스스로가 이 고통받는 사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면, 선포된 역경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귀환의 예언자
예레미야서에 의해 다른 어떤 예언서보다도 더 분명하게 예언자의 성격을 알게 된다. 단편적인 묘사를 통해서이긴 해도 예레미야의 내적인 성향, 마음 자체를 깊이 있게 꿰뚫어 볼 수 있다. 더욱이 그의 책은 자서전도 아니고 예언자의 개인적인 작품도 아니며 그의 제자 바룩의 작품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불러왔다.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그 두루마리에 모두 기록하였다”(예레 36,4). 우리는 마음속으로 스승의 발치에 앉아서 스승이 불러 주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듣고 기록하는 제자를 그려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룩의 작품은 피상적으로 고려해 볼 때 예측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다시 말해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그 내용과 같은 많은 말을 더 불러 주어 함께 적도록 하였다.”(예레 36,32)는 것을 우리는 읽는다. 여기서 바룩이 예레미야서의 구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 뚜렷해지고, 나아가 전작품을 모은 것이 바로 그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예언자로부터 들은 상세한 내용에다 그는 일인칭으로 양식화된 형태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다른 가지들, 그리고 예언자의 생애의 중요한 사실들을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아마도 예레미야가 죽은 뒤, 책을 펴낸 것은 바룩이었다. 따라서 그 책은 대부분이 예레미야의 작품이고 일부는 바룩의 작품이다.
예레미야의 삶과 작품에서 확인되는 것이 어쩌면 다른 예언자들의 경우에도 대체로 입증되는 것일까? 사실 다른 예언자들도 그 주위에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고 따라서 다른 예언서들도 그 제자들에 의해 집필되고 출간되었다고 믿는다. 실로 예언서의 대부분은 응집력이 결여되어 있고, 많은 경우 말하는 이는 예언자 자신이 아니고 예언자를 삼인칭으로 말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도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고, 언젠가 그들 가운데 하나에게 봉인된 예언 메시지를 보관하고 그 동료 제자들 사이에서 참된 규범으로 삼으라고 명령했다(이사 8,16). 게다가 이사야서를 읽어 보면 작품 전체가 몹시 이질적이고 독단적인 하나의 모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예를 들면, 흔히 그런 식으로 하나의 예언서가 시작되는 그의 소명에 대한 환시는 원래 따로 떨어 진 소책자였을 임마누엘에 관한 일련의 예언(이사7,12)이 개시되는 제6장에서 발견된다. 이 시리즈 앞엔 이른바 “시온의 노래”라는 예루살렘에 대한 짧은 예언 모임이 있다(이사 2-5장). 더욱이 제1장 서두에 하나의 제목이 있고(1,1) 제2장 서두에 또 다른 제목이 있다(2,1). 이는, 대부분의 사건에 있어서 이샤야 자신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형태의 책이 그의 제자들의 작품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나아가 어느 시대에나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이사 40-66장)이 앞의 장들(이사 1-39장)과는 전혀 다른 어조와 분위기를 띠고 있디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 두 번째 부분은 유다와의 전쟁과 예루살렘 포위 공격 - 첫 번째 부분이 풍부하게 다루고 있는 기원전 735~700년의 상황 - 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거기서 예루살렘은 멸망된 것으로 나타나고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로 상복을 입고 있다.
구약 성서의 예언서들 가운데서 이 두 번째 부분은 모든 장에서 말하고 있는 계속적인 위안으로도 구별된다. 통상적으로 예언서는 재난과 위협을 선포하는 반면 이 두 번째 부분에서는 벌을 기워 갚았고 몹시 갈망하던 구원이 가깝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된다.
풍부한 상징으로 바빌론 유배로부터의 해방이 선포된다. 즉 외국에서의 병역이 끝난다(이사 40,2), 죄인들의 사슬이 풀리고(이사 52.2), 버림받은 신부가 그의 신랑에게 돌아올 것이다(54,1-5). 두 번째 출애굽이 가깝고, 바다와 강이 마를 것이며(50,2), 바위가 깨뜨려지고 사막에 물이 넘쳐흐를 것이다(48,21). 큰길이 닦이게 될 것이며(40,3-4), 하느님 친히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실 것이다(52,7-12).
따라서 이 두 번째 부분은 참 이사야 이후 1세기 반이 지난 550년경에 쓰여졌다는 인상을 준다. 이사야 자신이 미래에 관한 환시를 통하여 이러한 일들을 기록했고 선포했다고 오랫동안 믿어 왔으나 오늘날은 적어도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이 대예언자보다 오래 살아 남은 제자단의 작품이라는 것을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다. 귀환의 예언자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이러한 예언들을 선포한 반면에 다른 동료 제자들은 그것을 스승의 작품, 즉 그들의 환경에서 태어났다고도 할 수 있는 옛 이사야서에 덧붙임으로써 기록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완결된 작품을 보면, 40~66장의 예언 전부가 이의 없이 저 “귀환의 예언자”(제2 이사야)의 작품은 아니고 40~55장만이 그의 작품인 반면에 나머지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아마도 팔레스티나에서 살았을 세 번째 예언자(Trito-Isaia)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덧붙이는 것이 옳다. 언어, 필체, 교리의 차이는 그러한 저자의 구분에 주요한 논거가 되며, 55~66장의 경우 (1) 신적 초월에 대한 교리와 (2) 율법, 안식일, 예배 규정의 실천, 특히 우상 숭배로부터의 탈피와 함께 인간적인 참여 그리고 (3)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비의 실천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에 대한 이러한 문제들은 그 책의 영감(靈感)과 예언적 특성에 전혀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
요나의 사명
나자렛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가나에 이르는 길의 오른쪽에 작은 아랍 마을 메셰드(Mesjed)가 있다. 바로 열왕기 하권 14장 25절에서 예언자 요나의 출신지로 언급되는 예전의 갓헤벨(Cat-Chevel)이다. 있을 수 있는 이러한 일치 때문에 메셰드의 주민들은 작고 초라한 회교 사원에 있는 요나의 무덤을 지적하는 데 익숙해 있다.
이 유적 앞에서 옛 순례자는 두 번 무덤에 묻힌 - 처음에는 바다 괴물의 뱃속에 묻히고, 마침내 갈릴래아의 산에서 발굴된 작은 무덤에 묻힌 - 예언자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이 무덤 곁에서 다르싯으로 가는 배에서 도망친 요나를 상상으로 다시 보았다. 순례자는 폭풍, 죄인의 신원, 그리고 요동치는 파도 속에서의 그의 포기를 생생하게 상상하였다. 조난자가 바다 괴물에게 빨려 들어갔다는 사실은 상상하는 데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나 그것이 성서에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결국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예언자의 생애는 니느웨의 회개에서 그 에필로그를 찾았다. 오직 어떻게 요나가 니느웨의 회개 후에 자신의 출신지로 돌아갔는지 설명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순례자도, 성서의 독자도 깊은 존경심을 갖고 하느님의 위대한 기적에 대해 생각했다.
반면에 오늘날의 순례자는 아주 다른 눈으로 메셰드의 회교 사원을 주시한다. 그에게도 마을이 열왕기에서 민족주의적인 편견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하느님의 사절인 아미때의 아들 예언자 요나의 출신지를 나타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대의 방문객조차 요나서에 대해 줄곧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의 주인공이 같은 이름을 갖고 있고 아미때의 아들과 같은 모양으로 그 역시 엄밀히 민족주의적인 정신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방문객의 상상도 통상적으로 아주 다양하다.
사실, 현대인은 한편으로 열왕기에서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이야기를 알아 보는 반면에, 또 한편으로 요나서의 저자에게서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자료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가 다른 목표를 의도했다는 확신을 갖는다. 그 책은 성인전 작가가 모든 독자에게 느끼게 하려고 하고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방식으로 사고한 이스라엘에게로 돌려진 하느님의 선포에 담겨 있는 문제를 두드러지게 설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선포는 그러한 모양으로 예언적 메시지들 사이에서 열거된다. 그러므로 요나서가 열왕기의 문학 유형과 다른 문학 유형이란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고,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장에서 극히 명료하게 구분되는 성서적인 설교의 텍스트를 제공한다.
비교적 작은 이 책에서 우리는 수많은 기적과 마주치게 된다. 갑자기 몰아치다가 같은 속도로 가라앉는 바다 위의 폭풍, 요나에게 떨어지는 운명, 조난자를 꿀꺽 삼킨 후 땅에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모습으로 뱉어 놓는 불가사의한 괴물, 니느웨의 회개와 관련된 위대한 기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느 날 커졌다가 말라 버리는 아주까리의 기적……. 덧붙여, 많은 기적들은 불균형을 이룰 정도로 크고, 지나치게 크며, 실제로 일어나기에는 알맞지 않다. 사실, 니느웨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 요나에게 확신을 줄 목적으로 불가사의한 나무를 크게 하셨다가 사라지게 하신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일련의 기적들은, 만일 그 모두가 - 성인전 작가에 의하면 - 기적적인 일들이 시나리오에 의해 필요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메시지에 색채를 부여하려는 이야기로 간주된다면, 이해하기가 아주 쉽다. 바로 예수께서 탕자의 이야기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사랑이시다.”라는 메시지에 색채와 깊이를 주시듯이, 요나서의 저자는 그의 기적적인 이야기로 “하느님은 이방인들을 사랑하신다.”는 메시지를 부각시킨다. 마지막 장의 불가사의 한 나무는 요나에게 운명 지워지지 않고, 그 묘사로 독자를 마지막 질문, 즉 “내가 어찌 이 큰 도시 니느웨를 아끼지 않겠느냐?”에 대비시킨다.
따라서 요나서는 하느님께서 예언자의 정신을 바꾸어 놓고자 하시는 데 이용하시는 일련의 사실들에 대한 역사적 보고서가 아니라, 저자가 모든 독자에게 그분 앞에서는 그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선의도 배척도 없는 하느님의 보편적 선을 묘사함으로써 확신을 주고자 하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진실일까 하는 질문에 우리는 그것이 성인전 작가에 의해서 의도되었다는 의미에서 진실이라고, 하느님의 선에 대한 메시지로서 진실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1년 9월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저는 아이입니다”(예레 1,4-10)
정태현
예레미야는 히브리말로 ‘하느님께서 일으켜주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는 예루살렘 북동쪽 5Km 정도 떨어진 아나돗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힐키야가 사제였으므로 그는 틀림없이 신심 깊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로서 그의 삶은 유년시절의 평온함과 달리, 유다 왕국이 말년에 겪어야 했던 격동의 세월처럼 박해와 갈등과 고통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고통의 예언자’로 기억한다.
그는 18세에 예언자 성소를 받았다. 때는 유다 임금 요시야의 통치 제13년, 곧 기원전 627년경이었다. 그러니까 요시야가 종교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였다.
(구약성서 새번역)
4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이렇게 내렸다.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6 내가 아뢰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7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다.“‘저는 아이입니다’라고 하지 말아라.내가 너를 보내면 너는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8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아라.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줄 것이기 때문이다.주님의 말씀이다.”9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내 입에 대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준다 10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며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기 위함이다.”
4절의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이렇게 내렸다.”는 말은 에제키엘서, 즈가리야서, 하깨서에서도 신탁을 끌어들이는 정식(定式)으로 자주 나온다. 이는 주님께서 예언자에게 계시하신 내용이나 그분께서 예언자에게 전하라는 메시지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선택하셨다. 삼손(판관 13,51), 세례자 요한(루가 1,15. 41), 바오로(갈라 1,15)와 예수님(루가 1,35; 요한 10,36)에게도 태어나기 전부터 이런 ‘성별’이 있었다. 하느님께 성별된 예레미야에게 맡겨진 소명은 ‘민족들의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민족들의 예언자라니! 예레미야서의 내용으로 보아 ‘유다의 예언자나 조금 범위를 넓혀 ‘이스라엘 전체의 예언자’라야 맞지 않을까? 사실 예레미야가 전한 신탁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주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의 신탁은 이따금 아시리아, 바빌론, 이집트 같은 이방 민족들도 대상으로 삼으며(예레 46-51장) 유다를 향한 신탁에도 뭇민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를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세우셨다는 5절의 말씀은 결코 틀린 내용이 아니다. 더구나 당시의 복잡한 고대 근동의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예레미야의 안목을 감안할 때 ‘민족들의 예언자’라는 칭호는 그에게 잘 어울린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레미야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른다.’고 사양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아직 공적으로 활동할 나이(30세 : 루가 3,23 참조)가 되지 않아서 말할 권리나 자격이 없어서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택은 단호하다. “내가 너를 보내면 너는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여기서 ‘누구에게나’는 히브리말로 ‘어느 곳에나’와 ‘어떤 환경에나’의 뜻도 들어있다. 하느님께 붙들린 자는 사람과 장소와 환경을 스스로 고를 수 없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분은 어떤 사람에게 소명을 주실 때, 그와 함께 계시며 함께 사건을 일으키시는 ‘임나누엘’이시다(창세 26,24; 출애 3,12; 판관 6,12; 이사 7,14; 마태 28,19-20). 예언자에게 맡겨진 임무는 민족들과 왕국들을 “뽑고 허물며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는” 것이다. 앞의 네 낱말은 파괴를, 뒤 두 낱말은 건설을 뜻한다. 예레미야는 먼저 징벌을 알리고(2-25장; 46-51장) 그 다음 재건의 희망을 선포한다(30-33장).
예레미야의 예언직은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부르심을 받은 기원전 627년부터 605년 가르그미스 전투까지이다. 요시야가 다스리는 동안 유다는 안정과 번영을 누린다. 아시리아가 주변 국가들에 대한 억압의 멍에를 느슨하게 늦춘 틈을 타 요시야는 영토를 넓히고 개혁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가 므기또 전투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에게 패배하고 전사하자 왕국은 급속도로 기울어진다. 바로 이 시기에 예레미야는 자기 동족을 고발하며 하느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 이제 재앙은 피할 수 없다. 백성 전체가 잘못된 길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억압하는 자들도 억압받는 자들도, 착취하는 자들도 착취당하는 자들도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5,1-6 참조). 예레미야가 바룩을 시켜 건네준 신탁 두루마리를 한 조각 한 조각 천천히 찢어 불에 태우는 여호야킴 임금의 행동은 그의 설교가 완전히 실패로 끝났음을 그대로 보여준다(36장).
두 번째 시기는 기원전 605-587년, 곧 느부갓네살의 즉위부터 예루살렘 파괴까지로 예레미야가 가장 활발하게 예언직을 수행하던 때이다. 바빌론의 침략으로 그의 예언이 갑자기 현실로 나타난다. 느부갓네살은 여러 차례 아람과 팔레스티나를 휩쓸고 그 도상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유다의 독립이 장애로 드러났다. 이런 절박한 형편에 유다의 지도자들은 정세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바빌론의 급부상하는 세력에 맞서려고 이집트와 주변의 약소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왕실 중심의 친이집트파가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일부 지도자들은 바빌론의 속국이 되어 자율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기를 희망하였다. 예레미야의 강력한 보호자인 아히캄, 그의 아들 게달리야, 네리야의 아들 바룩 등이 이 친바빌론파에 속하였다. 제3의 제안은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하여 극단 투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유독립파’의 주장이다.
이들 사이에서 예레미야도 어쩔 수 없이 정치적 논쟁에 휘말려들었다. 그는 바빌론의 패권 장악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가 기회주의자라서가 아니라 바빌론의 패권 안에서 하느님의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유다를 징벌하시려고 바빌론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다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바빌론의 멍에를 받아들여야 한다.
세 번째 시기는 기원전 587년, 곧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부터 그의 죽음까지이다. 바빌론에 유배 가지 않고 본국에 남은 백성은 세 가지 경향으로 갈라진다. 게달리야를 중심으로 바빌론의 보호 아래 나라를 재건하고자 한 친바빌론파,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암몬 임금에게 의존하면서 폭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던 자유독립파, 요하난이 이끄는 친이집트파가 그것이다. 이 세 번째 부류인 친이집트파는 예레미야를 인질로 끌고 이집트 망명길에 오른다. 예레미야의 흔적은 이 이집트 망명길에서 끊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과 시련을 겪던 시대에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소명을 받은 구약의 인물들은 예외없이 고통을 당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이 시기에 당신 백성과 더불어서 고통을 당하신 하느님의 대변인 구실을 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대변인은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그분의 고통을 증언해야 했기에 그들의 삶이 고통으로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스러운 역사 안에서 가장 고통을 많이 당해야 했던 인물은 예레미야였다.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친구와 친척들에게까지 버림을 받고 극도의 고독 속에 버려져 사면초가가 된 그는 자신을 낳은 날과 모태를 저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동족이 철저히 파멸되어 가는 처참한 모습을 예고하고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괴롭게 지켜보아야 했다. 더구나 그가 전한 신닥 가운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토록 성실한 사랑을 쏟았건만 그들로부터 배반을 당한 하느님, 사랑하는 그들을 징벌하신 다음 그들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안쓰러워하시는 하느님의 고통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평과 원망과 항변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예레미야의 고백록(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은 자신의 고통과 동족의 고통과 하느님의 고통을 모두 안고 그 고통의 무게에 짓눌린 한 의인의 피맺힌 절규이다.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 ·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사도직)
[경향잡지, 1999년 1월호]
[예언서 여행] 예레미야서
1) 예레미야 예언자는 누구인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이름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이름의 의미를 ‘야훼께서 푸신다.’로 볼 수도 있겠으나, 아마도 ‘야훼께서 일으키신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 힐키야는 벤야민 땅의 작은 마을 아나톳(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5㎞ 정도 떨어진 곳)에 살던 사제들 가운데 하나로 묘사된다.
2) 예레미야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적인 배경
예레미야서 1장 2-3절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요시야 임금 제13년(기원전 627/626년)에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던 치드키야 제11년(기원전 587년)까지 40년 동안 남부 유다 왕국을 무대로 활동했다고 전한다. 또한 예레미야서 40-44장은 예루살렘이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함락된 이후 예레미야 예언자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이집트로 끌려가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한다. 예 레미야 예언자의 활동 시기를 다음과 같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첫 번째 시기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부터 카르크미스 전투(기원전 605년)까지이다. 요시야 임금(기원전 640-609년)이 기원전 640년 8살의 나이로 남부 유다 왕국의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2열왕 22,1; 2역대 34,1 참조), 예레 1,2에 의하면 예레미야 예언자는 기원전 627년에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태어난 아나톳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으나, 그곳 주민들과 가족들로부터 분노를 사게 되어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11,21; 12,6).
② 두 번째 시기
예레미야 예언자의 활동의 두 번째 시기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고대 근동의 패자로 부상한 이후부터 예루살렘이 파괴되기까지(기원전 605-587년)이다. 기원전 605년 바빌론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유프라테스 강변 카르크미스에서 이집트 임금 느코의 군대를 쳐부숨으로써 아시리아의 옛 영토를 장악한다. 그러자 유다를 비롯한 팔레스티나 주변의 약소 국가들은 바빌론의 속국이 된다. 기원전 601년 다시 네부카드네자르와 느코가 이집트 국경에서 맞서 전쟁을 하지만 양쪽 모두 아무런 승리도 얻지 못하고 커다란 피해를 입고 만다. 이 틈을 타서 유다 임금 여호야킴은 바빌론에 바치던 조공을 거부하고 유다의 독립을 찾고자 하지만, 오히려 바빌론의 침략을 받고 바빌론 군대에 둘러싸인 채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③ 세 번째 시기
기원전 587년,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바빌론 제국에 의해 함락되자, 대다수의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으며(제2차 바빌론 유배), 유다 땅에는 소수의 비천한 계층의 사람들만이 남게 되었다(2열왕 25,12; 예레 52,16). 이 때 유다 땅에 남은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 세력으로 분류되었다. 바빌론에 의해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된 그달야를 중심으로 한 친바빌론파는 바빌론의 보호 아래 나라를 재건하고자 했는데, 예레미야도 이 그룹에 속했다. 이스마엘이 이끈 두 번째 그룹은 암몬 왕에게 의존하면서 폭력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고 노력했다(예레 41,1-10 참조). 세 번째 그룹은 카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이끄는 무리로서 이집트에 망명하기를 원했다. 이 망명 길을 만류하는 예레미야의 신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실천에 옮겼고, 이 과정에서 예레미야를 인질로 끌고 갔다. 이에 대한 응징으로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기원전 582년 세 번째로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예레 52,30).
3) 예레미야서의 본문
예레미야서의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 그리스어 칠십인역(LXX) 본문은 매우 심각한 차이를 드러낸다.
① 둘 사이에 외관상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차이점은 본문의 길이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 비해 그리스어 칠십인역 본문은 1/8 가량 짧다.
② 두 본문 사이에 언어적인 차이보다 더 심각한 차이는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신탁’의 위치에 있다. 칠십인역에서는 25장 13절의 “이 책에 기록된 모든 말”이라는 표현 다음에 바로 이 신탁이 등장하여 본문(25,14-31,44)을 이루는데 반해,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서는 이 부분이 예레미야서의 마지막(46-51장)에 가서야 나온다. 각 이방인들에 대한 신탁의 순서도 다르다. 칠십인역에서는 엘람 · 이집트 · 바빌론 · 필리스티아 · 에돔 · 암몬 · 아랍부족(케다르와 하초르) · 다마스커스 그리고 모압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서는 이집트 · 필리스티아 · 모압 · 암몬 · 에돔 · 다마스커스 · 아랍부족(케다르와 하초르) · 엘람 그리고 바빌론의 순으로 되어 있다. 칠십인역에서는 바빌론에 관한 신탁을 한 가운데에 놓고 마소라 본문에서는 맨 나중에 놓는데, 둘 다 이 신탁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같다.
4) 예레미야서의 구조 및 내용
그리스어 칠십인역(LXX)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경고,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이라는 예언서의 전형적인 3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어 칠십인역과 순서를 조금 달리하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은 제1부(1-25장)에서는 유다를 거슬러 선포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탁과 행동을, 제2부(26-45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내린 구원의 신탁 및 예레미야 예언자가 수행하는 예언직을, 제3부(46-51장)에서는 이방 민족들을 거슬러 예레미야 예언자가 선포한 신탁의 내용을 다룬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부록 : 52장)은 열왕기 하권 24장 18절-25장 30절에서 따온 역사적인 문헌으로 예루살렘의 함락을 다룬다.
① 제1부 : 유다를 거슬러 선포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탁과 행동(1-25장)
모세의 소명설화(탈출 3,1-12)와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1장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부르심을 다룬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모세처럼 매우 어려운 소임을 맡으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무력함을 호소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모세에게 하신 것처럼 그와 함께 해주시겠다는 약속으로 그를 부르시고 이끌어주신다.
㉠ 요시야 임금 시대에 내린 신탁들(2,1-6,30)유다를 거슬러 선포된 첫 번째 신탁은 요시야 임금 시대에 자행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만일 그들이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경우 그들 위해 내릴 심판을 선포하는 말씀들로 이루어져 있다(예레 2-6장).
㉡ 여호야킴 임금 시대에 내린 신탁들(7,1-20,18)유다를 거슬러 선포된 두 번째 신탁은 여호야킴 임금 시대를 배경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외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고발한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루살렘 성전만을 믿고 안심하며(7,4), 거짓된 지혜와 가르침을 자랑하는(8,3.11)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외적이고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깨치고 사랑과 법과 정의를 세상에 펴는 일”(9,23)이라고 선포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자신들을 거슬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거부하고 박해했으며, 이 때문에 예레미야는 고통 중에 하느님께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며 즉각적인 하느님의 구원 개입을 간청한다(11,18-12,5; 15,10-20; 17,12-18; 18,18-23; 20,7-18).
㉢ 치드키야 임금 시대에 내린 신탁들(21,21-25,38)유다를 거슬러 선포된 세 번째 신탁은 여호야하즈에서 치드키야까지의 유다의 마지막 임금들과 지도자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남부 유다 왕국의 몰락을 예고한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바빌론의 침략에 유다 왕국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치드키야 임금의 물음에 칼데아인들(바빌론인들)은 하느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도구이니 그들에게 항복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21,1-10).
또한 다윗 가문의 임금들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유다 왕실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한다(21,11-22,9).22,10-23,8에서는 남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임금들인 샬롬(여호야하즈), 여호야킴, 고니야(여호야킨)의 운명과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의 운명을, 23,9-40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들인 예언자들과 사제들의 죄악을 고발한다. 예레미야는 ‘무화과 두 광주리의 환시’(24,1-19)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유배지(기원전 597년의 제1차 바빌론 유배)에 끌려간 이들을 좋은 무화과처럼 보살펴주실 것이지만, 남아 있는 치드키야와 제후들은 나쁜 무화과처럼 다루시어 멸망시키실 것임을 선포한다.
② 제2부 :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내린 구원의 신탁 및 예레미야의 예언직(26-45장)
제2부는 예레미야의 신상에 관한 보도(26,1-29,32; 34,1-45,5)와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한 위로 신탁(30,1-33,26)으로 구성되어 있다.예레미야의 신상에 관한 보도는 역사적으로 매우 혼합되어 있어서, 35,1-36,32에서는 여호야킴 임금 시대에 34,1-22; 37,1-39,8에서는 남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임금인 치드키야 임금 시대와 예루살렘 파괴 사건 이후에, 40,1-45,5는 그달야 총독 시대를 배경으로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한 메시지와 그가 겪은 고난의 삶을 소개한다.
기원전 597년 이스라엘 백성의 제1차 바빌론 유배를 배경으로 하는 27-29장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에 대한 임금과 거짓 예언자들의 반응을 다룬다. 27장에서 예레미야는 에돔, 모압, 암몬, 티로, 시돈과 같은 이웃 나라의 대표들이 바빌론 임금을 거슬러 반항 운동을 펴나가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음을 전한다(기원전 594-593년). 28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제1차 바빌론 유배로부터의 귀환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거짓 예언자 하난야와 예레미야의 대결 장면이 묘사된다.
'위로의 책’으로 불리는 예레미야서 30-31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새 계약’(31,31-34)을 맺으심으로써 당신과 맺은 계약을 깨뜨린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신다. 이 ‘새 계약’은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의 중재를 통해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탈출 19-24장)을 단순히 갱신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 주심으로써 그들이 하느님을 바로 알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예레 31,33-34).
32-35장은 예루살렘 함락(기원전 587년) 직전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을 다루고, 36장 은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605년경에 예레미야 예언자가 어떻게 자신의 예언과 신탁을 두루마리에 옮겨 적었는지를 밝힌다. ‘바룩의 회고록’이라고도 불리는 36장에서 하느님의 명을 받은 예레미야는 그가 성전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없었으므로, 자신의 서기관인 바룩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두루마리에 받아쓰도록 지시한다. 예레미야는 안식일에 바룩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인 곳에서 두루마리를 읽게 했는데, 그 핵심 메시지는 바빌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된다는 경고였다. 여호야킴 임금은 그 내용을 들은 다음 그 두루마리를 찢어 불살라 버린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예고처럼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은 바빌론 제국에 의해 정복당하고 첫 포로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다.
37-45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에 관한 신명기계 역사관을 반영하여 유다의 멸망과 그 후의 팔레스티나의 상황을 언급한다. 사제들과 대신들은 예레미야를 죽이기 위해 요나탄 서기관의 집에 있는 구덩이에 그를 감금한다(37,15).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를 하느님의 사자로 생각한 치드키야 임금은 감금된 예레미야를 불러 개인적으로 그에게 조언을 구한다(37,17-21).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치드키야 임금의 아들들과 유다 귀족들을 살해한 반면(39,6), 예레미야 예언자를 석방해 그달야에게 그를 보살피도록 지시한다(39,14). 그러나 그달야가 왕족 이스마엘에게 살해된 후, 예레미야를 반대하던 세력들이 예레미야와 바룩을 이집트로 끌고 간다(43,6-7).
③ 제3부 : 이방 민족들을 거슬러 선포된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탁(46-51장)
46장의 머리글은 이 대목이 이방 민족들에 관한 신탁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민족들을 두고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46,1). 이 부분에서는 이집트를 거슬러 선포된 신탁(46장)을 시작으로 필리스티아(47장), 모압(48장), 암몬 · 에돔 · 다마스쿠스 · 케다르와 하초르 · 엘람(49장), 그리고 바빌론을 거슬러(50-51장) 선포된 신탁들이 차례로 이어진다.
이방 민족들을 거슬러 선포된 신탁들은 비록 그 형식과 내용 면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공통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 이사야서 13-23장처럼 예레미야 예언자는 부와 지혜, 그리고 군사력 등을 과신하는 이방 민족들의 오만함을 단죄한다. 둘째로 이사 44,9-20처럼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들의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을 단죄한다. 셋째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방 민족들을 거슬러 선포한 그의 신탁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 야훼 하느님이심을 강조한다.
④ 부록 : 예루살렘의 함락(52장)
예루살렘의 함락을 이야기하는 예레미야서 52장은 그달야의 살해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열왕기 하권 24,18-25,30을 거의 그대로 반복한다. 이 두 대목은 서로 예루살렘의 함락과 치드키야 임금의 운명, 그리고 기원전 560년경에 있었던 여호야킨에게 베풀어진 바빌론 임금의 은전을 다룬다.
5) 예레미야서의 중심 신학사상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하신 사랑을 ‘자애’, ‘사랑’으로 번역되는 ‘헤세드’라는 말로 표현하고, 하느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을 징벌하시는 그분의 정의를 ‘미쉬팟’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예레미야서에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에 성실하신 하느님의 자애와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잘못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정의가 강조된다. “나는 과연 자애(헤세드)를 실천하고 공정과 정의(미쉬팟)를 세상에 실천하는 주님으로 이런 일들을 기꺼워한다”(9,23).
[서동원 다미아노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교수)]
[성경 속의 인물]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격변기의 예언자다. 북 이스라엘은 사라졌고 남쪽 ‘유다국’은 주변 강국의 눈치를 보는 민족으로 전락했다. 언젠가 다른 나라에 흡수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유다 왕조의 이러한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사명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인근의 ‘아나톳’ 마을 출신이다. ‘반골기질’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다윗이 죽자 솔로몬은 이복형 ‘아도니야’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당시 대제사장 ‘에브야타르’는 아도니야를 지지했다. 하지만 솔로몬이 승리하자 그는 파면되었고 ‘아나톳’으로 쫓겨 갔다. 이때부터 이곳은 반체제 마을이 되었다. 이후 이스라엘의 제관 계급은 ‘차독가문’이 독식했고 ‘에브야타르’계 사제들은 출세 길이 막혔다. 예레미야의 부친은 아나톳에 살고 있던 사제였다.
예레미야는 16대 ‘요시야 왕’ 때 나타나 다섯 임금을 섬겼다. 17대 ‘여호아하즈’는 요시야의 장남이었지만 이집트 전쟁에서 포로가 된다. 이집트는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을 18대 왕으로 세웠다. 그가 ‘여호야킴’이다(2열왕 23,34). 그러나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에게 반기를 들다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여호야킨’이 19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3달 만에 실각되고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이 20대 임금이 된다. 그가 유다의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다(2열왕 24,17).
예레미야 예언의 핵심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민족 ‘바빌로니아’에 대항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설파했다. 다시 말해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시야’의 뒤를 이은 4명의 왕들은 모두 예언을 무시한 채 전쟁을 일으켰다가 포로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유다는 더욱 가중한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했다.
예레미야의 어원은 ‘이르므야후’(Yirmyahu)에서 왔으며 ‘야훼께서 내던지시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름 자체에서 ‘선택된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예언자는 20대 초반에 소명을 받고 평생을 오해와 편견과 테러에 시달리며 살아야했다. 그의 예언이 대부분 왕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야킴이 바빌로니아에 항전하려 조공을 중단하자, 예레미야는 성전을 빼앗기게 될 것임을 예언한다. 화가 난 왕은 예언자를 가두지만 결국은 네부카드네자르에게 패하고 만다.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 역시 전쟁준비에 광분하자 예레미야는 백성들을 선동하며 반대하다 다시 갇히는 처지가 된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치드키야는 두 눈을 뽑힌 채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2009년 9월 6일 연중 제23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 슬픔의 예언자, 예레미야
하느님 응원으로 절망 이겨내고 새롭게 말씀 선포
■ 감성 시인
예언말씀이 대체로 시적이지만, 그중 예레미야 가슴을 통해 토해진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그러하다. 문학적으로 보자면 예레미야는 감성 시인이다. 실감을 위하여 몇 구절만 보자.
“유다가 슬피 울고 그 성읍들이 쇠약해져 간다. 그들이 땅에 쓰러져 통곡하고 예루살렘이 울부짖는 소리가 높이 오른다” (예레 14,2).
이는 장차 예루살렘에 닥칠 파국에 대한 서술이다. 요컨대 ‘통곡이 치솟는다’는 얘기다. 동원된 언어들이 읽는 이들을 이미 고통의 복판으로 유인하지 않는가. 이는 맛보기일 뿐. 예언말씀으로 인해 그가 겪은 고통을 표현하는 대목은 읽는 이의 잠자던 감성을 흔들어댄다.
“내 심장이 내 안에서 터지고 내 모든 뼈가 떨린다.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술에 전 인간처럼 되었으니 이는 주님 때문이요 그분의 거룩한 말씀 때문이다” (예레 23,9).
느낌이 팍팍 온다. 훨씬 더 센 탄식도 있다.
“내 살과 내 살갗을 닳아 없어지게 하시고 내 뼈를 부수시며” (애가 3,4)
읽는 것 자체로 소름이 돋는다. 통곡이 치솟는다, 뼈가 떨린다, 살갗이 마모된다, 뼈가 으스러진다…. 모두가 예레미야가 바라본 현실의 우상놀음과 패역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서민들의 생활고, 이런 것들에서 직감되는 미구의 참상에 대한 언어적 반응이다. 그 실체는 물론 안타까움, 슬픔, 연민, 고통 등일 터다. 어쨌건, 예레미야는 이러한 고감도 공감력으로 백성과 하느님 사이를 중재했다. 그는 항시 하느님의 애간장 녹는 연민과 일체감을 느끼든지, 아니면 예언말씀을 듣는 청중의 처지에 감정이입하여 공명하고 있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러기에 이래저래 그는 마음이 심란했다.
■ 고통은 ‘내’ 운명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리기 시작한 것은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유다 왕이 된지 십삼 년 때의 일이었다. 그의 활동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킴에 이어, 또 다른 아들 치7드키야 통치 십일 년,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히즈키야 왕에게 이사야가 있었다면, 요시야 왕에게는 예레미야가 있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제도혁신을 기치로 내건 외적개혁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내적쇄신의 가이드라인을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제시하였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예레 7,3-4).
요시야 왕이 그토록 공을 들였던 성전정화, 전례의 정상화 등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마음의 회개가 먼저라는 것. 그리하여 생각의 ‘길’과 ‘행실’을 뜯어고치는 내적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전례 및 제도 개혁이 온전한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죄스런 인간이 내면에서부터 새로워질 수 있는가? 이는 추상적인 답변을 거부하는 물음이다. 오직 구체적인 대안만이 실효성을 지닌다. 그러기에 그의 예언말씀은 뭉뚱그려 선포되지 않고, 사회 모든 부류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맞춤으로 겨냥한다. 그는 ‘돌직구’로 말할 권위를 이미 예언 초기에 부여받았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 (예레 1,9-10).
예레미야가 말하는 대로 흥망이 결정된다는 약속! 하지만 아무리 옳은 말도 듣는 이 입장에서는 거북할 따름. 그가 앞날을 멀리 보아 남들 다 “잘 된다”고 할 때 “이러다가 망한다”고 이야기하고, 남들 다 “죽겠다”고 할 때 “살 길이 있다”라고 청개구리처럼 말하니, 누가 반기겠는가. 그로 인해 그는 숱한 고통을 겪는다. 온갖 비방과 혹평(예레 12,6 참조), 함구령(예레 11,21 참조), 체포 및 가택연금(예레 26,8 38,6 참조), 고문(예레 37,15 참조), 심지어 진흙구덩이 생매장(예레 18,22 참조) 등 말 그대로 기구망측하다. 박해자는 왕, 고관대작, 사제, 백성, 친척과 동향인 등 가릴 것 없다.
그 시달림이 얼마나 고역이었으면 예레미야 입술은 항시 ‘레마?’(=어찌하여?)라는 물음을 달고 다녔을까. 원망의 절정은 태어난 날을 성토하는 대목이다.
“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 복을 받지 마라,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 고난과 슬픔을 겪으며/ 내 일생을 수치 속에서 마감해야 하는가?” (예레 20,14.18)
그러나! 예레미야는 절망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견뎌냈다. 그때그때 하느님의 응원이 그를 동행했기 때문이다.
■ 불가항력
그의 예언 활동이 중기를 지나고 있을 무렵, 예레미야는 심한 의기소침에 떨어진다. 방금 언급했듯, 말씀을 전하면 되돌아온 것이 굴욕적인 박해였으니, 심사가 괴로울 만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으로 수백 번, 수천 번 예언 활동을 접는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예레 20,9).
이 불가항력은 예레미야 자신의 것만이 아니다. 이 시대 남은 자, 뜨거운 가슴들의 몫이기도 하다.
수만 번, 아니 무수히 접었었지.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심했었지.
“북에서 오랑캐가 쳐들어온다.
야훼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의 운명을
흉포한 바빌론 네부카드네자르의 손에 맡기셨다.
필연이다, 슬퍼하지도 울지도 기도하지도 말라”라고
야훼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저마다 머리에 재를 뿌리고 가슴을 찢을 줄 예기했건만,
되돌아온 것은 육두문자에 차꼬에 진흙 구덩이 생매장!
그래, 역류하는 피가 저항가를 불러댔지.
그래, 그분을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래,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그래, 이 결정에 번복은 없다.
그 노래 밤낮으로 불러대도, 나의 음모는 번번이 실패!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불가항력, 아- 어쩔 수가 없어.
저 어둠 골에 유폐하고 덮어두고 눌러둔 그 말씀,
스스로 발화하여 작열하니 심장이 달궈져 통제불가.
장작불 같은 진노에 용암 같은 자비가 덮쳐
하릴없이 사명이 용약하누나. 이 몇 번째 ‘다시’인가.
“나,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나이다.
나 무슨 강단으로 끝까지 저항하리오.
나 무슨 명분으로 거부하리오.” 이판사판!
말씀을 전하고 청중에게 맞아죽나
요지부동하다 말씀에 데어 죽나, 마찬가지.
기왕 선포할 바에야,
내친김에 불같이 미친 듯이 신명나게.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이.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6월 28일, 차동엽 신부]
[성경 속 기도] 예레미야의 기도부족한 사람이 참 예언자가 되기까지
미켈란젤로 - 예언자 예레미야, 성 시스티나성당 천장화 일부.
예레미야는 벤야민 땅 아나톳에 살던 사제 힐키야의 아들이다. 그는 스무 살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유다의 마지막 왕 치드키야 때까지 약 40년간 예언자로 활동했다. 예레미야의 활동 기간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였다. 좋은 정치를 펼쳤던 치드키야 왕이 죽은 후 므나쎄 55년간의 폭정이 계속되고 요시아 왕의 개혁 정책도 뒤이은 왕들의 실정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암흑과도 같은 시대가 지속되었고 특히 백성들의 생활은 몹시 피폐해졌다. 여기에 종교도 썩을 대로 썩어 일반 백성들의 고충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나서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였다.
당시 시대상은 정치,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가 부패하고 썩은 상태였기에 멸망을 경고하는 예레미야의 소명은 어렵고 힘든 것이었다. 실제로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는 거부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이 어려움 앞에 약해지는 인간이었다.
예언자로서의 활동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가끔 하느님께 기도 중에 불평을 쏟아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어쩌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기도였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예레 20,7-8).
또 예레미야는 바빌론에게 항복하라고 예언하여 매국노라는 오해를 받고 백성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때에도 너무 억울하고 백성들의 미래가 측은해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렸다.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도 완전히 하느님께 순명하지 못한 채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도망치려는 마음이 많았을 것이다. ‘왜 하필 내가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에 빠져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고향 친척조차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몰이해와 배척을 당할 때의 고통은 더 심하다.
예레미야는 이런 고통을 통해 참 예언자로서 완성되어 간 것이다. 그는 불완전하고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통해 완전함을 향해 나갈 수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느님께 붙잡혀 예언자가 된 예레미야였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전사의 임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를 통해 준비시키셨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뜻에 따라 그를 공격하는 적들 앞에서 완벽한 방비 태세를 갖춘 성읍과 같은 존재였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예레 1,18).
예레미야는 왕들과 사제들, 유다 전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공격을 당하는 사면초가의 절박한 상황에 처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기도를 통해 주님께 힘을 얻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19).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때 쉽게 좌절하거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시고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심을 깨달아야 한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17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참고자료
■ 폴 보샹 저, 이용권 역, 성경인물50 - 예레미야, 서울(생활성서), 2014년, 267-286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예레미야서',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311-63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