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스타니슬라오(Saint Stanislaus)
성 스타니슬라오(Saint Stanislaus)
축 일 : 4월 11일
신 분 : 주교, 순교자
활동 지역 : 크라쿠프(Krakow)
활동 년도 : 1030-1079년
같은 이름 : 스타니슬라우스, 쓰따니쓸라오, 쓰따니쓸라우스
폴란드 크라쿠프 교외 슈체파노프(Szczepanow)에서 출생한 성 스타니슬라우스(또는 스타니슬라오)는 그니에즈노(Gniezno)에서 수학한 뒤에 서품되었다. 그는 설교가로서 곧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려고 애썼고, 교회 개혁 의지를 강력히 표명하여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1072년 그는 크라쿠프의 주교가 되었는데, 국왕 볼레수아프 2세(Boleslaw II)의 잔학성과 불의를 고발함으로써 왕과 적대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국왕을 파문하고 대성당의 출입을 저지하자, 볼레수아프 왕은 크라쿠프 시외의 성 미카엘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그를 직접 끌어내어 살해하였다. 성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국민의 상징이다. 그는 1253년 9월 8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IV)에 의해 아시시(Assisi) 대성당에서 시성되었고,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홈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
1036년 폴란드의 슈체파누프에서 태어났고 파리에서 공부했다. 사제가 되어 1072년 람베르트 주교에 이어 크라쿠프의 주교가 되었다. 착한 목자로서 자기 교구를 다스렸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으며 매년 자기 교구의 사제들을 방문 했다. 두려움 없이 볼레슬라프 왕을 힐책하다가, 1079년 왕에 의해 암살당했다.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의 편지에서
(Ep. 58,8-9. 11: CSEL 3,663-666)
믿음의 투쟁
우리가 믿음의 투쟁을 하고 있는 동안 하느님께서 지켜 보시고 천사들도 지켜 보며 그리스도께서도 지켜 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시는 데에서 투쟁하고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승리의 월계관을 받는 것은 얼마나 큰 영예이며 기쁨이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온갖 힘의 방패를 두르고 순수한 정신과 완전한 믿음과 넘치는 열성으로 투쟁에 대비합시다. 하느님의 군대가 우리가 나아가는 전쟁터로 나아가기를!
복된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대비하고 무장을 갖추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 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무기들을 잡고 이 영적이고 천상적인 보호로써 우리 자신을 견고히 합시다. 그러면 악한 날이 올 때 악마의 위협에 저항하여 그를 격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의로 가슴을 무장합시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견고하게 되어 원수의 공격을 막아낼 것입니다. 우리의 발에는 복음에 대한 열성을 갖추어 무장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사탄의 머리를 짓밟고 부수기 시작할 때 사탄은 우리를 물어 쓰러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용감하게 믿음의 방패를 두릅시다. 그러면 그것을 방패로 삼아 원수의 모든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머리를 감싸 줄 영적 투구를 받아 씁시다. 그러면 우리 귀가 영혼을 살해하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며, 눈은 더러운 공상들을 보지 않게 될 것이고, 이마는 보호되어 하느님의 표지가 보존될 것이요, 입은 보호되어 그 입술은 승리할 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의 오른팔로 영적인 칼을 잡아 무장합시다. 그러면 헛된 제사를 용감히 거절할 것이며 주님의 몸을 영하는 감사제를 기억하여 그분을 포옹하고 훗날 주님으로부터 천상 월계관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마음에 간직하기 바랍니다. 이것을 새기며 묵상하고 있는 우리에게 박해의 날이 밀어닥치더라도, 그리스도의 분부와 권고로써 잘 훈련된 그리스도의 군사는 투쟁에서 물러서지 않고 승리의 월계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성 스타니슬라오(St. Stanislaus, 4월 11일)
목숨 아끼지 않고 불의에 항거, 폴란드 국왕 폭정에 일침...왕에게 살해 당해
1030~1079. 폴란드 출생 및 사망. 주교. 크라코프교구장. 폴란드의 수호성인
성 스타니슬라오는 자녀가 없어 고민하던 부부 슬하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신심이 깊었던 부부는 뒤늦게 아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마음먹었다.부모로 부터 독실한 신앙을 물려받은 스타니슬라오는 자연스럽게 사제의 꿈을 키웠다.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온 스타니슬라오는 크라코프교구 사제가 됐다. 그는 올곧은 성품과 뛰어난 학식으로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크라코프교구장이 된 스타니슬라오는 교회 정신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따끔히 혼내며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었다. 폭정과 문란한 사생활로 악명을 떨치는 폴란드 국왕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스타니슬라오는 왕을 찾아가 용감하게 왕의 잘못을 지적했다. 국민들은 그를 더욱 우러러보게 되었다.
왕에겐 스타니슬라오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왕은 스타니슬라오의 허점을 발견해 복수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흠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왕은 성인이 베드로라는 신자에게 계약서 없이 기증받은 토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베드로는 3년 전 세상을 떠났기에 왕은 그 자녀를 부추겨 스타니슬라오에게 토지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하라고 제안했다. 이미 가난한 이들에게 땅을 내줬던 스타니슬라오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재판에서 이기는 길은 죽은 베드로를 되살려 증언토록 하는 길밖엔 없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스타니슬라오는 3일 밤낮을 기도한 뒤 무덤에서 베드로를 살려냈다. 재판장에 베드로가 나타나자 모두가 아연실색했고, 소송을 부추긴 배후가 왕이라는 것이 밝혀져 왕은 온갖 비난을 받게 됐다.
더 많은 이들이 스타니슬라오를 칭송하며 따랐다. 왕은 그런 성인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이를 참지 못하고, 성인을 찾아가 그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그리고는 해외로 도망쳐 평생을 숨어 지냈다. 그는 1253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폴란드 출신 첫 성인으로 시성됐다. 성인의 유해는 현재 크라코프교구 바벨대성당에 모셔져 있다. 폴란드에서는 성인 축일을 5월 8일에 지내고 있다.
[평화신문, 2012년 4월 8일, 박수정 기자]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26-29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8권 - '스타니슬라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1년, 5255-5256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90-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