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Francis Coll Guitart)
축 일 : 4월 2일
신 분 : 신부, 설립자
활동 지역 : 다수의 지역
활동 년도 : 1812-1875년
같은 이름 : 귀타르트,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의 친구인 그레고리우스(Gregorius)가 지도하던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성 루드게루스(Ludgerus, 또는 루드제로)는 프리슬란트(Friesland) 사람으로서 프리슬란트와 색슨인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린 사람이 되었다. 그는 몸이 나약한 사람이었지만, 의지는 매우 강인하였으므로 사제가 된 후 프리슬란트로 가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선교는 성공을 거두어 많은 개종자를 얻었고 이교 신전을 파괴하였다. 그 후 그는 알퀴누스(Alcuinus, 5월 19일)로부터 명을 받고 영국 선교에 나섰다가 로마(Roma)로 왔고, 다시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서 3년을 지냈지만 베네딕토 회원으로서 서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성무일도에 특별한 신심이 있었는데, 여행 중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성무일도를 먼저 바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임종 날 아침에도 미사 중에 강론하고 또 다른 성당으로 가서 봉사한 뒤에, 그날 저녁에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그는 프리슬란트, 색슨, 브룩테리 그리고 수에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름난 선교사였다.
출처 : 가톨릭 홈
St Francisco Coll y Guitart (1812-1875)
St Francisco Coll y Guitart was born on 18 May 1812 in the small village of Gombreny, in the Diocese of Vic, Catalonia. He was the 10th and last child of a wool carder.
At the age of 10 he was sent to the Seminary in Vic in 1823. He completed his studies in 1830 and that same year entered the Convent of the Order of Preachers in Gerona, founded only about 35 years after St Dominic de Guzman's death. He made his solemn profession and received the Diaconate in 1831.
Contemporaries of Fr Coll testify that he always behaved as a man of God and led an exemplary life. In 1835 religious orders in Spain were forcibly suppressed and Friar Francisco Coll, was obliged to abandon his convent and become a secularized Dominican. He was nevertheless ordained a priest on 28 May 1836 despite the risks involved.
Indeed, in spite of being unable because of the new anti-clerical laws to live in his convent or to wear his habit, he remained a Dominican all his life in all that he was and all that he did. Soon after his ordination Francisco offered his services to his Bishop and for 40 years exercised his ministry as an itinerant missionary in the parishes of northeast Spain. Impelled by an irresistible force, he started to preach as a new apostle, "the apostle of modern times". Like the Founder of his Order, he received no stipend nor would he accept donations; he was a preacher of popular missions. He prayed for long hours, studied and dedicated a great deal of time to preparing sermons for preaching the missions. He believed in the efficacy of collaboration and gave spiritual exercises to the priests in the region. Thus he collaborated with diocesan priests, Jesuits, Claretians, Augustinians and fellow Dominicans. With his friend, St Anthony Mary Claret, he founded the "Apostolic Fellowship" for evangelization in 1846.
He preached to cloistered nuns and prisoners, visited the sick and imparted catechesis to children, always encouraging the devotion to the Virgin Mary. His complete trust in God and his apostolic zeal motivated him to gather a group of young women who had already chosen to follow Jesus' call. In 1850 he was appointed Director of the Secular Order of Dominican Tertiaries, which enabled him to found the Congregation of the Dominican Sisters of the Anunciata in 1856 to solve the problem of the Christian formation of girls, then considered inferior to boys.
When Fr Coll died, according to the Congregation he founded, there were already 300 sisters and 50 communities dedicated to the Christian education of children, mainly girls. Today the Congregation has about 1,039 members in Europe, America, Africa and Asia.
Fr Coll y Guitart lost his sight and then his mental faculties and was cared for by the nuns of his Congregation. He died in Vic on 2 April 1875 at the age of 62. His body was exposed in the chapel of his religious and they buried him in the local cemetery. His mortal remains were later translated to the chapel of the Mother House.
John Paul II beatified him on 29 April 1979. In his Homily for Fr Coll's Beatification, the Pope described him as "a transmitter of faith, a sower of hope, a preacher of love, peace and reconciliation among those whom passions, war and hatred keep divided", and "a real man of God", a "man of prayer", who made his priestly and religious identity a source of inspiration, with the words, "I am a religious" constantly on his lips.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금주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St. Francisco Coll Guitart,4월 2일)
1812~1875년, 스페인 출생 및 선종,
도미니코수도회 신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의 도미니코 수녀회 설립.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사제들에게 강론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강론 준비를 위해 연구와 기도와 묵상에 오랜 시간을 바쳐야 한다”면서 “강론은 추상적 진리나 차가운 삼단논법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성경 말씀이 선물임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2009년 시성된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 신부님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한 강론의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성인은 신자들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는 귀한 자녀임을 일깨워주는 강론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성인은 스페인 북동부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곳저곳을 다니며 하느님 말씀을 전해 ‘현대의 사도’로 불렸습니다. 성인은 강론 준비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고, 자료를 찾고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합니다.
성인은 또 병원에 입원한 환자, 감옥에서 지내는 재소자 등 하느님 말씀을 자주 접할 수 없는 이들을 자주 찾았습니다. 역병이 창궐했을 땐 더 자주 병원을 드나들며 환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성인이 있는 곳엔 언제나 미사와 말씀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성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의 도미니코 수녀회를 설립해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칠 수녀님들을 양성했습니다. 이 수녀회는 현재 세계 각국에 퍼져 있습니다.
성인은 1869년 강론하는 도중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됐습니다. 건강 또한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됐습니다. 주변에선 모두 쉬라고 권유했지만, 성인은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하며 신자들을 만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79년 성인을 복자품에 올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인은 신앙과 희망의 증거자이자 사랑과 평화의 전도사”라며 성인의 삶을 칭송했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3월 29일, 박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