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니콜라오 데 플뤼에(Saint Nicholas de Flue)
축 일 : 3월 21일
신 분 : 은수자
활동 지역 : 스위스(Switzerland)
활동 년도 : 1417-1487년
같은 이름 :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스위스의 옵발덴 칸톤 삭셀른 교외의 비옥한 평야에 위치한 플뤼얼리 태생인 성 니콜라우스 데 플뤼에(Nicolaus von Flue, 또는 니콜라오)는 도로테아 비스와 결혼하여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고, 5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1439년의 취리히 전쟁에서 주민들과 합세하여 싸웠고, 1453년의 전쟁에서는 대장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공직자가 되는 것을 꺼렸다.
1467년 그의 나이 50세에 때에, 그는 아내와 자녀들의 동의를 얻어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고향 근교인 란프트 움막에서 9년 동안을 지냈다. 이때부터 그는 성덕과 지혜로 명성이 드높았고, 주민들과 지도자들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481년의 스위스 연방을 확립할 때 프리부르와 솔레르의 합병에도 큰 공을 세웠고, 부르고뉴(Bourgogne)의 찰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도 한 몫을 하였다. 그는 스위스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수도자의 상을 정립하였고, ‘클라우스 수도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1487년 3월 21일 자신의 움막이 있던 란프트에서 선종하였고,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시성되었다. 그는 스위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고, 스위스와 독일에서는 그의 축일을 9월 25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홈
플뤼에의 성 니콜라오(St. Nicolas of Flue, 3월 21일)
움막서 20년간 은수생활...아내와 자녀들도 격려하며 기도로 후원
1417~1487 스위스 출생 및 사망. 은수자.
스위스의 수호성인 성 니콜라오는 스위스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성인입니다. 성인은 군인으로, 판사로, 열 자녀의 아버지로 성공한 삶을 살았지만 말년에는 은수자로 살아가며 기도와 고행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성인은 평범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21살에 군대에 입대해 여러 전투에 참여했던 그는 냉철한 판단력과 자기 자신보다는 동료를 먼저 돌보는 전우애로 명망을 쌓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대장을 맡아 전투를 진두지휘하기도 했습니다.
성인은 제대한 뒤 부모 권유로 결혼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전쟁이 끝나면 은수자로 살기로 결심했지만 부모 뜻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딸 다섯과 아들 다섯을 둔 성인은 신심 깊은 아내와 함께 성가정을 이뤘습니다. 군대에서 쌓은 명망으로 성인은 마을 판사로 추대됐고 크고 작은 마을 일을 지혜롭게 해결했습니다. 자칫 마을 간 분쟁으로 이어질 뻔한 일도 성인이 나서면 평화롭게 마무리됐습니다.
성인은 평소 기도생활에 열중했는데 저녁식사를 마치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밤을 새기 일쑤였습니다. 성인은 결국 하느님 부르심을 깨닫고 온전히 하느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마을 외곽에 움막을 지어 홀로 20년을 지냈습니다. 성인의 독실한 신심을 지켜봐왔던 아내와 자녀들은 성인의 은수생활을 격려하며 기도로 뒷받침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인은 은수생활 20년 간 물과 음식을 먹지 않았고 매일미사를 봉헌하며 성체만 모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움막에 기거하는 성인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지혜를 구하기 위해 성인을 찾아왔습니다. 스위스 전역은 물론 유럽 여러나라에서 많은 이들이 성인을 방문했습니다.사람들은 성인의 겸손함과 영성에 탄복했고 성인이 조언해준 대로 난관을 헤쳐갔습니다. 성인은 자신이 머물던 움막에서 선종했고 1947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스위스와 독일에서는 9월 25일을 성인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플뤼에의 니콜라오 성인',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186-189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 '니콜라오 폰 플뤼에',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6년, 1482-14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