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쿠네군다(Saint Cunegundes)
축 일 : 3월 3일
신 분 : 동정녀, 과부, 황후
활동 지역 : 룩셈부르크
활동 년도 : 978-1033/1039년
같은 이름 : 구네군다, 구네군데스, 구네군디스, 쿠네군데스, 쿠네군디스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또는 구네군다)는 룩셈부르크의 백작인 부친 지크프리트와 모친 헤드비그로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신심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공작인 성 헨리쿠스 2세(Henricus II, 7월 13일)와 결혼하였다. 이때 성 헨리쿠스는 동방의 어느 목수가 제작한 십자가를 선물했는데, 이것이 지금도 뮌헨에 보존되어 있다. 어느 전기작가는 그들 부부는 결혼식 날에 동정서원을 발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당시의 황제인 오토 3세가 서거하자 성 헨리쿠스는 바이에른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그의 대관식은 마인츠(Mainz)에서 성 빌리지스(Willigis, 2월 23일)에 의하여 성대히 거행되었고, 이어 1013년에 그는 로마(Roma)로 가서 교황 베네딕투스 8세(Benedictus VIII)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았다. 그런데 결혼 첫날밤부터 서로 동정을 지키며 남매처럼 지내던 성녀 쿠네군다는 얼마 뒤에 중상자들의 희생물이 되었고, 남편마저 일시적이나마 아내를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확고히 항변해야 할 입장에 선 그녀는 불에 의한 시죄법(試罪法) 적용을 허용해 달라고 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성 헨리쿠스는 자신의 의혹을 풀고 마음으로 일치하여 살았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국내의 신앙 전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성녀 쿠네군다는 황제에게 청을 드려서 밤베르크(Bamberg) 대성당을 비롯하여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짓게 하였고, 교황 성하가 직접 오시어 축성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러던 중에 중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녀는 병이 나으면 카셀(Kassel) 근교 카우푼겐에 수도원을 세우겠다고 약속하고, 그 후 이 일이 거의 완공될 무렵 남편 성 헨리쿠스가 운명하였다.
1024년 남편의 기일을 맞이하여 성녀는 카우푼겐 성당을 수차례나 방문하고 미사 때 복음을 봉독한 뒤에, 그녀는 원래의 십자가 일부를 제대에 봉헌하였다. 그 후 그녀는 주교로부터 수녀복을 받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지난날의 황녀로서 모든 부귀영화를 잊고 비천한 환경과 초라한 수도원에서 기꺼이 살았으며, 하느님 앞에 흠 없는 삶을 살았다고 주위 사람들이 높이 칭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는 1200년 3월 29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카톨릭 홈
[금주의 성인] 성녀 구네군다(St. Cunegndes, 3월 3일)
낮은 자리로 임했던 황후…동정부부로 살았으며 많은 기적 뒤따라
975~1040. 신성로마제국 황후. 룩셈부르크 수호성인.
성녀 구네군다는 샤를마뉴 황제 7대손으로 100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3세에 이어 황제가 된 헨리의 아내다. 부모에게 엄격한 신앙생활을 물려받은 성녀는 결혼할 당시 "하느님 앞에 정결한 마음으로 평생 기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며 남편에게 동정부부로 지내달라고 부탁했다. 남편 헨리 역시 아내 구네군다 못지 않은 신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들 부부는 훗날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는 한때 중상모략에 빠져 황후로서의 정결을 의심받았다. 성녀는 당시 정결을 증명하는 관습대로 불에 달궈진 철판 위를 맨발로 걸었는데, 아무런 화상 없어 모든 이들이 놀랐다. 이 일로 그를 존경하며 따르는 이들은 더 늘어났다. 기적같은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교황 문서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성녀가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던 중 깜빡 잠이 들게 됐다. 이 때 촛불이 침대에 옮겨 붙어 방에 불이났다. 불길에 놀라 잠이 깬 성녀는 기도하며 십자성호를 긋자 불이 저절로 사그라들었다.
성녀는 황후로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검소한 생활로 많은 이들에게 칭송받았다. 특히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자주 찾아가 위로하며 선행을 베풀었다. 몸이 쇠약해진 성녀는 독일 헤세 카우풍엔에서 요양하며 그 지역에 성 베네딕도회 수녀원을 짓기로 약속했다. 성녀는 수녀원 건립에 자신의 재산과 제단을 꾸밀 보석들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1024년 남편 헨리 황제가 서거하자 자신이 설립한 수녀원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성녀는 이곳에서 황후로 생활한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겸손하게 살았다고 한다. 수녀원측은 성녀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황금실로 짠 수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성녀는 자신의 장례를 다른 가난한 이들과 똑같이 치러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성녀 유해는 독일 밤베르크대성당에 안치됐으며 120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시성됐다.
[평화신문, 제1008호(2009년 3월 1일)]
[교회의 빛나는 인물들] 성녀 구네군다
성녀 구네군다는 독특하게 동정녀이며 과부이며 황후로서 교회를 빛낸 성녀이다. 룩셈부르크의 백작인 부친 지그프리드와 모친 헤드비히의 딸로 태어나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교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구네군다는 20세 때 남독 바이에른의 공작인 헨리코 2세와 결혼하였다. 이때 남편 헨리코는 동방의 어느 목수가 제작한 십자가를 선물했는데, 이것이 지금도 독일 뮌헨에 보존되어 있다.
당시의 황제인 오토 3세가 서거하자 성 헨리코는 1002년 바바리아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그의 대관식은 독일 마인츠에서 성 빌리지스에 의하여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어 오토 3세 대제 후임으로 1013년에 로마 베드로 성전에서 교황 베네딕도 8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으면서, 종교에 충실하며 성교회를 보호할 것을 맹세하였다.
구네군다는 결혼 첫날밤 헨리코 황제에게 “하느님께 정결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 일생을 동정으로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자 남편도 “실은 나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남매처럼 지내자. 그러나 세상에는 알리지 말고 끝까지 감추어 두자”고 제의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정결을 지키며 동정부부로서 다투어 성덕에 나가려고 노력하였고, 로마 순교록에도 그녀에게 ‘동정녀’라는 칭호를 붙이고 있다.
그녀는 깊은 신앙심과 함께 정치 수완도 뛰어나 황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는 나라를 대신 잘 다스렸으며, 빈민과 병자 방문도 열심히 하였다. 비록 국경일에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연회에 참석하였지만, 혼자 있을 때면 검소한 차림으로 엄격한 대재(大齋)를 지켰다. [2014년 1월 19일 연중 제2주일 청주주보 3면]
성녀 구네군다는 남편을 성인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그녀의 희생과 기도로 헨리코 황제 치세(治世) 동안 나라는 화목과 정의가 넘치는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정결한 부부에게도 큰 시련은 있었다. 황제가 밀고자의 말을 듣고 부인의 정결에 대하여 의심을 품은 것이다. 확고히 항변해야 할 입장에 선 성녀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불에 의한 ‘시죄법(試罪法)’ 적용을 허용해 달라고 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하여 뜨거운 불속에 들어가 걷고 난 뒤에도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무죄를 강력하게 항변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성녀 구네군다는 뜨거운 불로 벌겋게 달구어진 12개의 쟁기 위를 걸어갔다. 화상을 입으면 죄가 있고, 무사하면 죄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사람들이 놀라는 가운데 아무런 상처 없이 쟁기 위를 걸어감으로써 그녀의 결백은 증명되었다. 황제도 달려가 머리를 숙이고 잘못을 사과했으며, 그 후로는 부인을 더욱 신뢰하고 존경하였다. 성 헨리코는 자신의 의혹을 풀고, 마음으로 일치하여 살았다. 그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국내의 신앙 전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이러한 이들 부부의 성덕이 ‘요셉의 결혼’이란 전설을 낳게 했다.
1007년 성녀 구네군다는 황제에게 청을 드려서 황제와 더불어 밤베르크 교구를 설정하고, 대성당을 비롯하여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러던 중에 중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녀는 병이 나으면 카쎌 근교 카우푼겐에 수도원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후 성녀는 1021년, 그곳에 베네딕도 수녀원을 세웠다. [2014년 1월 26일 연중 제3주일(해외원조주일) 청주주보 3면]
성녀 구네군다는 1024년,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나라를 다스려 달라는 청을 물리치고 수도 생활에 전심(全心)할 것을 결심하였다. 남편이 죽은 지 1년이 되던 때에 카우푼겐 성당 봉헌식이 있었는데, 복음이 낭독된 후 왕관과 화려한 옷을 벗은 그녀는 머리를 깎고 주교로부터 수도복을 받아 입은 후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재산은 성당 건축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도록 봉헌하였고, 수도 생활을 하는 동안에 지난날의 황녀로서 누리던 모든 화려했던 부귀영화와 높은 신분을 잊고 비천한 환경과 초라한 수도원에서 기꺼이 살았다.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흠없는 삶을 살았다고 주위사람들이 높이 칭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는 어떤 비천한 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했으며 병자 방문도 계속하였다. 기도와 성서 읽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음식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정도만 취하는 등 엄격한 보속 생활을 하다가 선종하였다.
성녀 구네군다의 유해는 밤베르크 성당으로 운반되어 항상 ‘오빠’라고 부르던 남편 헨리코 황제 옆에 묻혔다. 이들의 완전한 일치는 지상에서 시작하여 불로써 시험받고, 천국에서 완성되었다.
1200년 3월 29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의해 시성된 구네군다 성녀의 생애는 권세와 부귀 영화가 인간을 교만과 방종으로 이끌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겸손하고 정결한 생활로 완덕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삶이다. 교회는 성녀의 축일을 3월 3일에 지낸다.
[2014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 청주주보 3면, 장인산 베르나르도 신부(문화동 본당 주임)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녀 쿠네군다 황후 동정',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61-364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 '구네군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5년, 810-811쪽. 2쪽.